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라고 자신의 묘비명을 써달라고 보르헤스는 유언했다. 일본계 혼혈인 비서였던 아름답고 젊은 마리아고타마에게. 그녀는 87세의 보르헤스와 결혼해 마지막 석 달을 함께 지냈다. 그가 소년 시절을 보냈으며 이제 묻히고 싶어했던 도시 제네바에서 그의 임종을 지켰다. - P7
여자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다. 이마를 찡그리며 흑판을 올려다본다. 자, 읽어봐요. 알이 두꺼운 은테 안경을 낀 남자가 미소를 머금으며 말한다. 여자는 입술을 달싹인다.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인다.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이 조용히, 빠르게 뒤치럭거린다. 여자는 입술을 벌렸다 다문다. 숨을 멈췄다 깊이 들이마신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겠다는 듯, 남자가 흑판 쪽으로 한발 물러서며 말한다. 읽어요. 여자의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 여자는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는 순간 자신이 다른 장소로 옮겨져 있기를 바라는 듯이. 흰 백묵 자국이 깊게 박힌 손가락으로 남자는 안경을 고쳐쓴다. 어서, 말해요. - P10
그 소소한 발견들이 그녀에게 얼마나 생생한 흥분과 충격을 주었던지, 이십여 년 뒤 최초의 강렬한 기억을 묻는 심리치료사의 질문에 그녀가 떠올린 것은 바로 그 마당에 내리쬐던 햇빛이었다. 볕을 받아 따뜻해진 등과 목덜미. 작대기로 흙바닥에 적어간 문자들. 거기 아슬아슬하게 결합돼 있던 음운들의 경이로운 약속. - P14
그후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그녀는 일기장 뒤쪽에 단어들을 적기 시작했다. 목적도, 맥락도 없이 그저 인상 깊다고 느낀 낱말들이었는데, 그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 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숲. - P14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이 입을 열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소름끼칠 만큼 분명하게 들린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하찮은 하나의 문장도 완전함과 불완전함, 진실과 거짓, 아름다움과 추함을 얼음처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혀와 손에서 하얗게 뽑아져나오는 거미줄 같은 문장들이 수치스러웠다. 토하고 싶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 P15
오히려 더 밝고 진해진 정적이 어둑한 항아리 같은 몸을 채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붐비는 거리에서, 그녀는 마치 거대한 비눗방울 속에서 움직이듯 무게 없이 걸었다. 물 밑에서 수면 밖을 바라보는 것 같은 어른어른한 고요 속에, 차들은 굉음을 내며 달렸고 행인들의 팔꿈치는 그녀의 어깨와 팔을 날카롭게 찌르고는 사라졌다. - P17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다. "공포는 아직 희미했다. 고통은 침묵의 뱃속에서 뜨거운 회로를 드러내기 전에 망설이고 있었다. 철자와 음운, 헐거운 의미가 만나는 곳에 희열과 죄가 함께, 폭약의 심지처럼 천천히 타들어가고 있었다. - P17
기억만으로 선득한 그 감각을 잇사이로 누르며 그녀는 쓴다. διεφθάρθαι . 얼음 기둥처럼 차갑고 단단한 언어. 다른 어떤 단어와도 결합되어 구사되기를 기다리지 않는, 극도로 자족적인 언어. 돌이킬 수 없이 인과와 태도를 결정한 뒤에야 마침내 입술을 뗄수 있는 언어. - P21
쓰라리고도 달콤한 그 슬픔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가까이 있는 당신의 진지한 옆얼굴에서, 미세한 전류가 흐르고 있을 것 같은 입술에서, 그토록 또렷한 검은 눈동자들에서 흘러나온 것이었습니다. - P37
문득 눈이 시어 눈물이 흐를 때가 있는데, 단순히 생리적이었던 눈물이 어째서인지 멈추지 않을 때면 조용히 차도를 등지고 서서 그것이 지나가기를 기다립니다. - P41
이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고, 거기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다. 신이 선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는 무능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 않고 다만 전능하며 그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면 그를 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하고 전능한 신이란 성립 불가능한 오류다. - P43
그곳은 이곳보다 일곱 시간 늦게 해가 뜨지요. 이제 멀지 않은 날에, 내가 정오의 태양 아래에서 필름조각들을 꺼내들 때 당신은 새벽 다섯시의 어둠 속에 있겠지요. 당신 손등의 정맥을 닮은 검푸른 빛은 아직 하늘에서 다 새어나오지 않았겠지요. 당신의 심장은 규칙적으로 뛰고, 타오르며 글썽이던 두 눈은 눈꺼풀 아래에서 이따금 흔들리겠지요. 완전한 어둠 속으로 내가 걸어들어갈 때, 이 끈질긴 고통 없이 당신을 기억해도 괜찮겠습니까.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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