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그 사람이 자기 자신 때문에 몹시 괴로워할 테니까. 그 사람이 그러는 걸 아무도 보지 못했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해도. 정말 나쁜 짓을 했는데 벌을 받지 않으면 벌을 받는 것보다 마음이 더 괴롭거든. 훨씬 괴로워."

-알라딘 eBook <착한 여자의 사랑>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중에서 - P97

그런 성질을 가진 거짓말은 인간의 머릿속 한 귀퉁이에, 구석에 거꾸로 매달린 박쥐처럼 잠복하고 있다가 뭐든 검은 마음이 보이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런 걸 꾸며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꿈이 얼마나 정교한지 보라. 층층이 구성된 꿈에서 우리가 기억해 말로 옮길 수 있는 부분은 그 표면을 긁어낸 부스러기뿐이다.

-알라딘 eBook <착한 여자의 사랑>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중에서 - P107

그게 사실이기만 하다면 이 방과 이 집과 그녀의 삶은 그녀가 지난 며칠 동안 끌어안고(혹은 탐닉하며—어떤 식으로 표현하든) 전전긍긍하던 가능성과는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그 다른 가능성이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고, 그녀가 할 일은 그것이 다가오도록 그저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었다. 침묵함으로써, 침묵을 통해 협조함으로써 이득이 되는 일이 생길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녀 자신에게도.

-알라딘 eBook <착한 여자의 사랑>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중에서 - P109

하지만 만약 그녀가 배의 움직임에만, 아주 살짝 비밀스럽게 흔들리는 그 움직임에만 정신을 집중했다면, 먼길을 오는 동안 지나온 모든 것이 고요해진 듯 느껴졌을 것이다.

-알라딘 eBook <착한 여자의 사랑>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중에서 - P113

그가 자신이 유리한 입장임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그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그에게 물어볼 것이다. 그게 사실인가요?
사실이 아니라면, 그는 그런 걸 물어봤다는 것 때문에 그녀를 미워할 것이다. 사실이라면—그녀는 줄곧 그게 사실이라고 믿지 않았던가?—그는 다른 방식으로, 더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를 미워할 것이다. 그 즉시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그건 진심이고, 정말 진심일 것이다—말하더라도.

-알라딘 eBook <착한 여자의 사랑>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중에서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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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was like the same game every time, and she wasn’t supposed to suspect what was going on, and when he had the thing out looking in her eye he wanted her to keep her panties on, him the dirty old cuss puffing away getting his fingers slicked in and puffing away. - P61

They had caught on at once to the day’s air of privilege, its holiday possibilities, Enid’s unusual mix of languor and excitement.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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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라고 자신의 묘비명을 써달라고 보르헤스는 유언했다. 일본계 혼혈인 비서였던 아름답고 젊은 마리아고타마에게. 그녀는 87세의 보르헤스와 결혼해 마지막 석 달을 함께 지냈다. 그가 소년 시절을 보냈으며 이제 묻히고 싶어했던 도시 제네바에서 그의 임종을 지켰다. - P7

여자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다. 이마를 찡그리며 흑판을 올려다본다.
자, 읽어봐요.
알이 두꺼운 은테 안경을 낀 남자가 미소를 머금으며 말한다.
여자는 입술을 달싹인다.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인다.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이 조용히, 빠르게 뒤치럭거린다. 여자는 입술을 벌렸다 다문다. 숨을 멈췄다 깊이 들이마신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겠다는 듯, 남자가 흑판 쪽으로 한발 물러서며 말한다.
읽어요.
여자의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
여자는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는 순간 자신이 다른 장소로 옮겨져 있기를 바라는 듯이.
흰 백묵 자국이 깊게 박힌 손가락으로 남자는 안경을 고쳐쓴다.
어서, 말해요. - P10

그 소소한 발견들이 그녀에게 얼마나 생생한 흥분과 충격을 주었던지, 이십여 년 뒤 최초의 강렬한 기억을 묻는 심리치료사의 질문에 그녀가 떠올린 것은 바로 그 마당에 내리쬐던 햇빛이었다. 볕을 받아 따뜻해진 등과 목덜미. 작대기로 흙바닥에 적어간 문자들. 거기 아슬아슬하게 결합돼 있던 음운들의 경이로운 약속. - P14

그후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그녀는 일기장 뒤쪽에 단어들을 적기 시작했다. 목적도, 맥락도 없이 그저 인상 깊다고 느낀 낱말들이었는데, 그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 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숲. - P14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이 입을 열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소름끼칠 만큼 분명하게 들린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하찮은 하나의 문장도 완전함과 불완전함, 진실과 거짓, 아름다움과 추함을 얼음처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혀와 손에서 하얗게 뽑아져나오는 거미줄 같은 문장들이 수치스러웠다. 토하고 싶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 P15

오히려 더 밝고 진해진 정적이 어둑한 항아리 같은 몸을 채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붐비는 거리에서, 그녀는 마치 거대한 비눗방울 속에서 움직이듯 무게 없이 걸었다. 물 밑에서 수면 밖을 바라보는 것 같은 어른어른한 고요 속에, 차들은 굉음을 내며 달렸고 행인들의 팔꿈치는 그녀의 어깨와 팔을 날카롭게 찌르고는 사라졌다. - P17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다.
"공포는 아직 희미했다. 고통은 침묵의 뱃속에서 뜨거운 회로를 드러내기 전에 망설이고 있었다. 철자와 음운, 헐거운 의미가 만나는 곳에 희열과 죄가 함께, 폭약의 심지처럼 천천히 타들어가고 있었다. - P17

기억만으로 선득한 그 감각을 잇사이로 누르며 그녀는 쓴다.
διεφθάρθαι .
얼음 기둥처럼 차갑고 단단한 언어.
다른 어떤 단어와도 결합되어 구사되기를 기다리지 않는, 극도로 자족적인 언어.
돌이킬 수 없이 인과와 태도를 결정한 뒤에야 마침내 입술을 뗄수 있는 언어. - P21

쓰라리고도 달콤한 그 슬픔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가까이 있는 당신의 진지한 옆얼굴에서, 미세한 전류가 흐르고 있을 것 같은 입술에서, 그토록 또렷한 검은 눈동자들에서 흘러나온 것이었습니다. - P37

문득 눈이 시어 눈물이 흐를 때가 있는데, 단순히 생리적이었던 눈물이 어째서인지 멈추지 않을 때면 조용히 차도를 등지고 서서 그것이 지나가기를 기다립니다. - P41

이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고, 거기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다.
신이 선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는 무능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 않고 다만 전능하며 그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면 그를 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하고 전능한 신이란 성립 불가능한 오류다. - P43

그곳은 이곳보다 일곱 시간 늦게 해가 뜨지요.
이제 멀지 않은 날에, 내가 정오의 태양 아래에서 필름조각들을 꺼내들 때 당신은 새벽 다섯시의 어둠 속에 있겠지요. 당신 손등의 정맥을 닮은 검푸른 빛은 아직 하늘에서 다 새어나오지 않았겠지요. 당신의 심장은 규칙적으로 뛰고, 타오르며 글썽이던 두 눈은 눈꺼풀 아래에서 이따금 흔들리겠지요. 완전한 어둠 속으로 내가 걸어들어갈 때, 이 끈질긴 고통 없이 당신을 기억해도 괜찮겠습니까.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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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n she saw a movement, and it wasn’t in the water. There was a boat moving. Tied to a branch, a plain old rowboat was being lifted very slightly, lifted and let fall. Now that she had found it, she kept watching it, as if it could say something to her. And it did. It said something gentle and final. You know. You know. - P63

If you do something very bad and you are not punished you feel worse, and feel far worse, than if you are." - P66

She felt her purse in her lap, the weight of her camera in it—that reminded her. - P70

He would only have to give her a shove with one of the oars and topple her into the water and let her sink. Then leave the boat out on the water and swim to shore, change his clothes, and say that he had come in from the barn or from a walk and found the car there, and where was she? Even the camera if found would make it more plausible. She had taken the boat out to get a picture, then somehow fallen into the river. - P72

If it was not true, he would hate her for asking. If it was true—and didn’t she believe all the time that it was true?—he would hate her in another, more dangerous way. Even if she said at once—and meant it, she would mean it—that she was never going to tell. - P72

I am not going to tell, but you are. You can’t live on with that kind of secret. You cannot live in the world with such a burden. You will not be able to stand your life. - P72

And she will not phone the Police Office the next day. She will wait and they will phone her and she will go to see him in jail. Every day, or as often as they will let her, she will sit and talk to him in jail, and she will write him letters as well. If they take him to another jail she will go there; even if she is allowed to see him only once a month she will be close by. And in court—yes, every day in court, she will be sitting where he can see her. - P73

She smelled under the whiskey the bitter breath that came after a sleepless night and a long harsh day; she smelled the deeply sweat-soaked skin of a hardworked man that no washing—at least the washing he did—could get quite fresh. No bodily smell—even the smell of semen—was unfamiliar to her, but there was something new and invasive about the smell of a body so distinctly not in her power or under her care.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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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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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도 치열한 삶을 살다간 작가의 마지막 미공개 에세이는 작지만 큰 울림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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