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종교(신)는 가장 오래 공리의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왕이 그 자리를 잠깐 차지했고 뒤이어 이성과 법률이 그 자리를 점했다. 선험적 진리(공리)를 전제로 모든 사회구조와 체계를 배치했다는 점에서 인류의 역사는 공리체계를 정교하게 다듬어온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적어도 19세기 전까지 공리체계는 매우 공고하게 유지됐다.
알고 보면 근대 국민국가는 공리체계와 동일한 구조로 구성됐다. 나폴레옹 법전에 기초한 현대적 법체계는 대부분 공리체계와 동일한 구조를 갖는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스피노자의 《에티카》, 뉴턴의《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는 물론 미국 독립선언문에 이르기까지 근대를 열었던 수많은 책과 문서들이 《원론》의 형식과 닮아 있다. 책의 내용이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원리가 될 것이라는 자부심 혹은 권력의지에서 비롯된 자연스런 귀결이다. 국가는 시민들의 자발적 동의, 즉 계약에 기초해 있다는 근대국가론에서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국가의 존재 이유를 설정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2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