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계속 달리고 있었다. 조수석 차창의 서핑하는 고양이 스티커가 숲과 구름 사이로 미끄러졌다. 풍절음이 통감자가 덜덜 떠는 소리처럼 들렸다. 근육질이 "이런" 하고 뱉자 곱슬머리가 "젠장" 하고 받았다. 두 사람은 킥킥 웃었다.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170

괘종시계는 게스트하우스 1층 구석에 서 있었다.
들어오는 이에게도 나가는 이에게도 눈에 잘 띄는 위치는 아니었다. 굳이 바다를 등지고 앉아 시선 둘 곳을 찾던 사람이라면 괘종시계를 발견했을 수도 있다. 짙은 빛깔의 목재 케이스는 어지간한 어른 키 높이였고 황동색 시계판을 얼굴처럼 달고 있었다. 유리문 안 배꼽께에서는 둥글고 묵직한 시계추가 좌우를 오가며 철컥, 철컥, 침착한 소리를 냈다. 눈썰미가 좋은 손님은 나름 멋을 부려 양각된 덩굴식물과 새 두 마리를 찾아냈을지도 모른다. 몇 발짝 다가섰다면 유리에 희미하게 남은 금빛 글자를 읽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이렇다 할 특색이 없어서 관공서 로비나 학교 중앙 현관, 종친회 사무실 같은 데 서 있는 것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것들이 덩치에 비해 눈길을 끌지 못하고 풍경에 녹아 있듯 그 시계도 마찬가지였다. 삼십 년이 넘도록 어느 손님도 시계를 멋지다고 칭찬하지 않았고 낡았다고 흉보지도 않았다. 가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이 시계 맞는 거예요?"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171

열두 바퀴를 돌렸는데 느낌이 없었다. 힘을 주어 열쇠를 비틀어보니 반 바퀴가 더 돌아갔다. 태엽이 톱니에 걸리는 작은 소리. 더이상은 돌아가지 않았다.
분명 예전에는 열두 바퀴였다고 생각했다.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172

한 시간이 지나는 동안 시침도 한 시간을 이동해 있었다. 분명히 열두 바퀴였다고 생각했지만 별수없었다. 계단을 몇 번 오르내리는 것으로 시큰해지는 무릎처럼 시계도 어딘가 헐거워졌을 법했다.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172

한 늙은 남자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디서부터 걸어왔는지 낡은 검은색 패딩 점퍼에 눈송이들이 축축이 달라붙어 있었다. 구부정한 자세였지만 키는 컸고, 팔다리까지 길어서 어쩐지 사마귀를 연상시켰다. 목까지 여민 점퍼 위로 삐죽 솟은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그 부자연스러운 주름 탓인지 나이가 많다기보다는 노동의 더께가 쌓여 일찍 늙어버린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평온한 표정이었으나 검푸른 낯빛 때문에 인상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175

그는 파도란 배를 뒤집거나 사람을 삼키는 것으로만 알았고, 그렇게 영영 사라진 누구네 삼촌들의 성씨를 기억했다. 파도가 돈이 되리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물이 들어올 때, 아니 파도가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할 것 같았으나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177

보는 것만으로 포근해지는 그 요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끈적한 지방덩어리가 들러붙은 닭의 사지를 썰고 핏물을 빼야 했다. 그는 누군가를 먹이려면 피를 봐야 한다는 사실을 도마 앞에 서서 뒤늦게 배워갔지만 그 기분이 싫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 지냈던 포구를 떠올리면 비릿한 피 냄새. 해진 운동화 밑에서 미끌거리던 생선 내장. 줄지어 앉아 묵직한 칼로 생선을 내리치던 어른들. 그 많은 생선 대가리는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182

어둠 속에서 사마귀가 우두커니 괘종시계를 보고 있었다. 좁은 어깨에 앙상한 다리. 러닝셔츠와 사각팬티만 입은 모양새가 자기 집 거실에 서 있는 사람처럼 보여 도리어 이쪽에서 자리를 피해줘야 할 듯했다.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183

기억이란 한번 열쇠를 꽂고 태엽을 감으면 줄줄이 흘러나오는 것일지도 몰랐다. 축 결혼. 축 결혼. 신혼여행은 서울이었다. 63빌딩이 개장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한여름. 바닷가 사람이 무슨 수족관 구경이냐 싶었지만 아내는 살아서 헤엄치는 색색의 물고기들을 신기해했다. 생선이랑 물고기는 다르다고 말했던가.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185

아무 가게에서 아무것이나 담아줄 법한 평범한 비닐봉지였다. 축구공만한 크기였는데 주둥이를 단단히 조여 매서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별다른 냄새도 나지 않아 내용물을 확인하려면 봉지를 찢는 수밖에는 없어 보였다. 숙박객이 쓰레기를 방에 남기는 경우는 흔했지만 그 봉지는 께름칙했다. 매듭을 쥐고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보기보다 묵직했고 물기가 있는 듯 아래가 살짝 출렁거렸다. 그는 그것을 반드시 돌려주고 싶어졌다.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187

"만약에 말입니다. 제가 정말 가져갈 생각이 없다면, 그래서 받아들지 않는다면, 그걸 어떻게 제게 주시겠습니까?"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188

하늘이 맑았다. 눈밭은 하얬고 바다는 파랬다. 음식냄새를 피우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날이었다. 미안한 일에 사과하고 고마운 일에 인사하기. 마주앉아 밥을 먹고 나란히 서서 사진 찍기. 그러려면 때맞춰 울리는 알람이 필요하다는 느낌. 한시에는 한 번, 열두시에는 열두 번의 종소리가 울리도록. 돌아가면 오른쪽 태엽을 감아보고 싶었다. 열두 바퀴든 열두 바퀴 반이든. 그때 잘못 셌거나 지금 잘못 셌거나. 아니면 그때는 열두 바퀴였는데 이제는 열두 바퀴 반이거나. 시계판 뒤에 무슨 장난과 음모가 있든 살아야 할 시간이 많았다. 어쩌면 서핑을 배울 수 있을 만큼 긴 시간이 있을지도 몰랐다. 왜 시도도 안 해봤을까. 나도 파도를 탈 수 있지. 그래, 나는 파도를 탈 수도 있어.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189

오늘의 무게가 내일의 영광.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192

용감하면 카지노 손님이 되고, 똑똑하면 카지노 직원이 된다.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195

버리려면 들어야 했다. 버리는 것과 떨어뜨리는 것은 아주 달랐다.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201

방해하는 사람은 없어.
그래. 사실 언제나 없었지. 적어도 역도대 위에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도 말리지도 않았어. 송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들었거나, 내가 들지 못했을 뿐.
이상하게 말이야.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210

다시 땅에 붙인 두 발바닥. 송희는 두 발 아래 깊이 묻혀 있는 검은 돌들을 떠올렸다. 시간과 열기와 압력 속에서 태어나 빚어진 것들. 그로부터 시작된 분화. 아득히 오래전부터 솟구친 힘이 마침내 도착하는 정확한 자리. 송희는 숨을 참았다. 굳게 잠긴 복부 안에서 작고 단단한 무엇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뜨거워. 나 지금 뜨거워.
쇳덩이를 쥐고 두 발로 바닥을 밀어내는 순간.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211

성인이라면 부피는 가로 십오 센티미터, 세로 십오 센티미터, 높이 이십 센티미터 전후, 무게는 천사백에서 천육백 그램 사이다.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216

이 잡지의 표지에 늘 등장하는 시계는 ‘지구 종말 시계The Doomsday Clock’로 널리 알려졌다. 인류 문명의 종말을 자정으로 간주하여 경각심을 일으키기 위한 의도였다. 1947년 최초로 공개되었을 때는 자정 7분 전이었다.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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