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년 전이었다.
아니다. 이 년 전이었나.
윤중정 회장이 더이상 얘는 내가 통제하지는 못하겠구나, 생각하게 된 게 그때였다. - P7

혼인신고라는 건 징역살이와 마찬가지다. 윤중정 회장은 징역도 두 번을 살았기 때문에 이를 잘 알았다. - P9

윤 회장은 어쨌든 이 또한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클라이언트를 접대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녹둥에서 자동차로 사십 분거리인 인천으로 넘어가 5성급 호텔 객실 하나 물색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최근까지 그렇게까지 해야할 접대는 아예 없었다. 13.5평 아파트의 황량함을 가려보려고 곳곳에 ‘와신상담‘이니 ‘재기’니 하는 붓글씨를직접 여러 장 써서 누런 벽면의 공백을 메워넣기도 했다. 징역살던 시절 영치되어 달달 외우다시피 한 <한 달 만에 작살나는 고사성어 550』이라는 책자가 도움이 되었다. 자고로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자기계발을 해야 하는 법이다. 그게 윤중정 회장의 지론이었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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