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 쓰기 프로그램은 처음에는 실용적인 차원에서 내게 도움이 되었다. 그것은 이혼에 쏠려 있던 나의 관심을 딴 데로 돌려주었다. 그때까지 마치 충성스러운 개처럼 오직 남편과 파탄 난 우리의 결혼 생활만을 향해 질주하고 또 질주하던 생각들이 이제 다른 사람들의 삶에 머물기 시작했다.
-알라딘 eBook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이미리내 지음, 정해영 옮김) 중에서 - P14
3은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마법의 숫자다. 한 단어는 너무 제한적이고 둘은 마치 이중생활을 암시하는 것처럼 뭔가 꺼림칙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셋은 삼두정치와 3부작, 삼위일체에서처럼 완벽한 균형을 암시한다. 사람들은 너무 작지도 너무 크지도 않은 3이라는 숫자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알라딘 eBook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이미리내 지음, 정해영 옮김) 중에서 - P15
우리 모두 자신의 삶에 대한 온전한 부고를 가질 자격이 있지 않을까? 모든 삶과 죽음이, 가장 눈에 띄지 않고 민폐가 되는 삶조차도, 말해야 할 중요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굴러다니는 풀들의 마지막 휘파람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받아 적기 위해 그곳에 있었다.
-알라딘 eBook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이미리내 지음, 정해영 옮김) 중에서 - P16
묵미란은 이상해 보이는 외모에 걸맞게 이상한 성을 가진 노파였다. 내가 묵이라는 성을 가진 한국인을 만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녀는 머리 전체가 새하얀 데다 부스스하게 들떠 있어서, 마치 머리 주위로 커다란 훈륜(暈輪)이 걸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팔다리는 대게처럼 길고 가늘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서 나는 그녀의 몸을 지도처럼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투명한 피부를 통해 십자로 얽힌 산길 같은 핏줄이 자줏빛과 연푸른색으로 드러났다. 눈부신 백색광이 높은 광대뼈 밑에 한 쌍의 나비 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알라딘 eBook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이미리내 지음, 정해영 옮김) 중에서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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