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사이 그녀의 얼굴은 마치 뼈 위에 얇은 가죽을 덮어놓은 것처럼 말라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모든 표정이 닳아 없어져, 어떤 감정도 담을 수 없는 질긴 가죽만 남은 것 같았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87
높고 반듯하게 솟은 그 나무들의 줄기와 가지에도 눈이 얼어 있다. 하늘은 파랗고, 차가운 햇빛이 우듬지의 윤곽을 에워싸고 있다. 한동안 고개를 뒤로 젖히고 올려다보다가, 내가 그것들을 아름답다고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냉혹할 만큼 완전하게 은희 언니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87
사람 몸을 태울 때 가장 늦게까지 타는 게 뭔지 알아? 심장이야. 저녁에 불을 붙인 몸이 밤새 타더라. 새벽에 그 자리에 가보니까,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고 있었어.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92
실내의 훈기에 몸이 녹는 것을 느끼며 점심을 준비한다. 때로 대충 넘어가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만, 수술 후 삼 년이 가까워오는 지금까지 한 끼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기름 없이 볶은 새송이버섯과 데친 두부, 두 가지 나물과 현미밥 반 공기를 막 식탁에 차렸을 때 윤이가 현관 번호키를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96
저것은 단지 K 선생님의 해묵은 고통이 짓이겨진 흔적일 뿐인데, 묵묵히 바라보고 있자면 마치 내 지난 삼 년이 으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그림을 바라보는 동안 그림도 골똘히 나를 바라본다. 서로의 눈길이 어긋나, 서로가 볼 수 없는 곳을 더듬는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101
부질없는 심문과 대답 사이, 체념과 환멸과 적의를 담아, 서늘하게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는 시간. 눈이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는 시간. 내 죽음 속으로 그가 결코 들어올 수 없고, 내가 그의 생명 속으로 결코 들어갈 수 없는 시간.
그 모든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 시간. 오직 삶을, 삶만을 달라고, 누구에게든, 무엇에게든 기어가 구걸하고 싶던 시간.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101
그녀에게 말해보고 싶었다.
새벽까지 타는 심장을 그녀가 지켜보았던 그해, 생각 속의 미로 속에서 더듬더듬 내가 움켜쥐려 한 생각들을.
시간이 정말 주어진다면 다르게 살겠다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짐승처럼 죽지 않도록, 다음번엔 두려워하지 않을 준비를 하겠다고. 내 안에 있는 가장 뜨겁고 진실하고 명징한 것, 그것만 꺼내놓겠다고. 무섭도록 무정한 세계, 언제든 무심코 나를 버릴 수 있는 삶을 향해서.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105
그러지 마,라고 그때 말했어야 했다.그러지 마. 우리 잘못이 있다면 처음부터 결함투성이로 태어난 것뿐인걸.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설계된 것뿐인걸. 존재하지 않는 괴물 같은 죄 위로 얇은 천을 씌워놓고, 목숨처럼 껴안고 살아가지 마. 잠 못 이루지 마. 악몽을 꾸지 마. 누구의 비난도 믿지 마.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108
얼핏 잠이 엷어질 때마다 숲의 산책로가 어른거렸다. 하루에 두 번, 움직일 수 있는 한 걸었던 그 길가에 흰 질경이꽃이 핀다. 여린 잎들이 버드나무에 돋아난다. 어지러운 햇빛이 돌아온다. 희거나 목이 길거나 부리가 노란 새들이 온다. 생명이 온다. 조금 더 버티면. 후회와 고통을, 깊게 찌르는 자책을, 안 지워지는 얼굴을 등지고 조금 더.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109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 문장을 지우고 기다린다. 온 힘으로 기다린다. 파르스름하게 사위가 밝아지기 전에,그녀가 회복되었다,라고 첫 문장을 쓴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110
왜 하필 오늘 그 새를 기억했는지 모르겠다.
지난 십이월이었다. 영하 십오 도의 한파가 잠깐 물러간 일요일 오후에 그 새를 보았다. 산책로가 둥글게 구부러지는 곳이었는데, 서리가 내린 풀숲 가장자리에서 그것은 얼굴을 가슴 쪽으로 파묻고 죽어 있었다. 두루미 종류의 흰 새였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83
그의 아침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작됐다. 머리맡의 자명종을 눌러 끄며 몸을 일으켰고, 침대 옆의 책상을 더듬어 안경을 썼다. 검푸른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속옷 바람으로 서재 문을 열고 나갔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112
서재로 침대를 옮기고 난 첫 밤을 그는 가끔 기억했다. 다시 자취생 신분으로 돌아간 기분으로 홀가분하게 잠을 청하며 그는 약간의 행복마저 느꼈다. 그러나 한 달이 채 지나기 전에 행복감은 껌에서 단물이 빠지듯 사라졌다. 대신 그는 하루하루 잠이 얇아졌다. 자신의 코 고는 소리에 놀라 깨곤 했으며, 일단 깨고 나면 무수하게 만져지는 어둠의 겹, 예민한 수면의 마디들을 일일이 느끼며 몸을 뒤척였다. 야근이 잦은 편이고 출근 시간이 이른 그에게 숙면은 필수적이었다. 그는 서서히 체중이 빠졌고, 더욱 서서히 말수가 줄었다. 그 변화가 워낙 완만했기에 아내를 비롯한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113
이상한 것은 그의 왼손이 마치 나름의 의지를 가진 것처럼 뺨의 상처 주변을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114
그는 오른손을 선반으로 뻗어 안경을 썼다. 이제 그의 모습이 정확하게 보였다. 흰 러닝셔츠는 군데군데 물방울에 젖었고, 왼손은 여전히 왼뺨의 상처 위에 가만히 놓여 있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왼손을 뺨에서 떼어냈다. 순순히 떼어졌다. 그 동작은 마지못해 그의 뜻을 따르는, 내키지 않아 하는 타인의 손과 닮은 데가 있었다. 이상하다. 그는 유심히 거울을 바라보았다. 이제 왼손은 얌전히 욕실 바닥을 향해 늘어뜨려져 있었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114
그의 왼손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가 막 돌아서려던 찰나였다. 몸 쪽으로 끌어당기고 말고 할 틈도 없이 왼손은 정확하고 기민하게 뻗어나가 그녀의 뺨에 얹혔다. 매끄러운 뺨의 감촉이 그에게 전해졌다.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셨다. 커다랗게 치켜뜬 눈에 밤 불빛들이 술렁였다. 그의 왼손은 번지듯 뺨에서 미끄러져 그녀의 섬세한 콧날을, 이마를, 눈두덩을 어루만졌다.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는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에 닿았을 때에야 그의 왼손은 짧게 떨며 멈췄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125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덩어리진 어둠이 가로등 사이를 빠르게 헤엄쳐 거꾸로 달리고 있었다. 번쩍이는 가로등의 전구들이 거대한 안구들 같다고, 그를 위협하듯 집요하게 노려보는 것 같다고 그는 느꼈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138
오랜만에 당신을 불러봅니다. 거긴 지낼 만한가요. 나는 여전히 여기서 잘 지내고 있어요. 서른일곱 살이 되었고, 웃을 때면 눈가에 잔주름이 파이기 시작하고, 가르마 오른쪽으로 흰머리가 꽤 났습니다. 아마 머리가 빨리 희어지려나 봐요.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16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