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과 함께 눅진한 어둠이 비바람을 몰고 왔다. 작달비가 두들긴 갑판 곳곳을 파도가 또 때리며 휘감았다. 노련한 선부들은 돛대며 노병아며 배물항아리를 붙들었다. 젖은 옷은 무겁고 축축한 신발은 미끄러웠다. 배가 취객처럼 흔들리는 동안에도 몸을 갑판에 밀착한 채 파동을 타며 손발을 놀렸다. 느슨한 줄은 단단히 매고 삐걱대는 물품은 붙들어 고정했다. - <참 좋았더라>, 김탁환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618baa01dc14be3 - P13
178센티미터의 후리후리한 이중섭은 행인이 없는 틈을 타 가방을 어깨에 메고 배에서 내렸다. 출항 때보다 광대가 더 튀어나오고 턱도 뾰족했다. 코끼리처럼 늘어선 굵직굵직한 건물들을 눈으로 훑었다. - <참 좋았더라>, 김탁환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618baa01dc14be3 - P18
거친 손이 점퍼 앞주머니로 들어왔다가 나갔다. 등 뒤에서 카멜 두 갑을 넣은 이는 별명이 부엉이인 갑판장이었다. 은지화에 대한 답례인 것이다. 송곳으로 긁기만 했을 뿐이고 후반 작업이 남았다며, 부산에서 완성해 둔 다른 은지화를 내밀었지만, 갑판장은 배에서 방금 새긴 작품을 달라고 했다. - <참 좋았더라>, 김탁환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618baa01dc14be3 - P19
강구안을 바라보았다. 돌아올 것은 알았지만, 돌아왔을 때, 가족이 없는 항구에 또다시 혼자 남겨졌을 때, 뼈를 부수고 살을 저미고 피를 말리고 숨을 옥죄는 헛헛함까진 몰랐다. - <참 좋았더라>, 김탁환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618baa01dc14be3 - P21
겹으로 선 장벽이 하늘을 가렸다. 북으로는 원산의 어머니, 남으로는 도쿄의 아내와 두 아들에게 갈 길이 막힌 것이다. 두 차례 이산(離散)이 심장을 찌르고 또 찔렀다. 망망대해 외딴섬이고, 설산 바위 꼭대기 홀로 뒤틀린 소나무였다 - <참 좋았더라>, 김탁환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618baa01dc14be3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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