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꽤 지난 일이 되었지만, 내가 구 주 가까이 병원에 입원해야 했던 때가 있었다. 뉴욕의 병원이었는데, 내 침대에서는 밤이면 환한 불빛이 기하학적으로 밝혀지는 크라이슬러 빌딩의 풍경이 바로 보였다. 낮에는 그 빌딩도 아름다움을 잃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서서히 여느 건물과 다름없는 그저 덩치 큰 건물이 되어갔고, 도시의 모든 건물들은 멀찍이 떨어져 침묵을 지키는 듯 보였다. 5월이 지나고 6월이 되었다. 창가에 서서 저 아래 보도를 내려다보며 봄옷을 입은 젊은 여자들—내 또래—이 점심시간에 돌아다니는 모습을 지켜보던 것이 기억난다.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머리가 움직이는 것이, 그들의 블라우스가 산들바람에 잔물결을 이루는 것이 보였다. 나는 퇴원하면 보도를 걸을 때 나도 그렇게 걷는 사람 중 한 명이라는 사실에 감사하는 마음을 절대 잊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여러 해 동안 정말로 잊지 않았다—병실 창문에서 내려다보았던 풍경을 떠올리며 내가 그 보도를 걷고 있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알라딘 eBook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중에서 - P10

엄마가 이곳에 와서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애칭으로 나를 부르자 내 몸이 따뜻해지면서 액체로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내가 느끼는 모든 긴장감이 예전에는 고체였는데 이제는 아닌 것처럼.

-알라딘 eBook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중에서 - P13

엄마는 자신의 감정과 말과 관찰이 오랫동안 자기 안에 꾹꾹 눌려 담겨 있었던 것처럼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는데, 내 기억에는 지금까지 엄마가 이런 방식으로 말한 적이 없었다. 나는 이따금 까무룩 잠이 들었고, 눈을 뜨면 다시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하지만 엄마는 말했다. "오, 위즐디. 넌 좀 쉬어야 해."

-알라딘 eBook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중에서 - P16

아이들은 자신의 환경을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하지만, 비키 언니와 나는 우리가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운동장에서 다른 아이들이 우리에게 "너희 식구들한테서는 냄새가 나" 하고 말하고는 손가락으로 코를 잡으며 달아났기 때문이다. 언니는 2학년 때—교실에서 아이들 앞에 서서—담임교사에게 가난이 귀 뒤의 때에 대한 핑계가 될 수 없으며 비누를 살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는 훈계를 들었다.

-알라딘 eBook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중에서 - P17

사람들은 언니와 나의 사이가 가까울 거라고 예상하겠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우리 둘 다 친구가 없었고, 우리 둘 다 멸시를 당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을 쳐다볼 때 그랬던 것처럼 의심의 눈초리로 서로를 보았다. 지금은 내 인생도 완전히 달라졌기에,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어쩌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을 거라고. 하지만 햇살이 내리쬐는 보도를 걷거나 바람에 휘는 나무 우듬지를 볼 때, 또는 이스트 강 위로 나지막이 걸린 11월의 하늘을 바라볼 때, 내 마음이 갑자기 어둠에 대한 앎으로 가득차는 순간들이—예기치 않게—찾아오기도 한다. 그 앎이 너무 깊어 나도 모르게 소리가 터져나올 것 같고, 그러면 나는 가장 가까운 옷가게로 들어가 낯선 사람과 새로 들어온 스웨터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아마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도 이렇듯 반쯤은 알게 반쯤은 모르게, 사실일 리 없는 기억의 방문을 받으면서 세상을 이런 식으로 어찌어찌 통과해나갈 것이다.

-알라딘 eBook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중에서 - P20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공포라는 감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보도를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이 어떤 마음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삶은 아주 많은 부분이 추측으로 이루어진 듯하다.

-알라딘 eBook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중에서 - P20

엄마는 안경을 벗고 안경알 각각에 후후 입바람을 분 뒤 자신의 스커트로 닦았다. 그 순간 나는 엄마의 얼굴이 정말로 벌거벗은 듯 보인다고 생각했다. 나는 엄마의 벌거벗은 듯 보이는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알라딘 eBook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중에서 - P23

내가 열한 살이 될 때까지 우리는 차고에서 살았다. 차고는 그 바로 옆집에 살던 종조부 소유였는데, 그 차고에서는 임시로 만든 개수대에서 똑똑 떨어지는 찬물만 쓸 수 있었다. 벽에 못을 박아 고정시킨 단열재는 분홍색 솜사탕 같은 재료로 만든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유리섬유라 손을 베일 수 있다고 했다.

-알라딘 eBook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중에서 - P27

그 책들 덕에 몇 가지 얻은 것이 있다. 이것이 내 말의 요점이다. 책이 내 외로움을 덜어주었다. 이것이 내 말의 요점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도 사람들이 외로움에 사무치는 일이 없도록 글을 쓰겠다고!

-알라딘 eBook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중에서 - P29

따뜻한 교실에서 보낸 시간 덕에, 그 시절의 독서 덕에, 숙제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충실히 하는 게 의미가 있다는 걸 깨달은 덕에—이런 것들 덕에—내 성적은 점점 완벽해졌다. 고등학교 졸업반 때 진로 상담 선생님이 나를 상담실로 불러, 시카고 외곽의 어느 대학에서 모든 비용을 다 대주는 조건으로 입학을 제의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알라딘 eBook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중에서 - P29

내 기억으로는 우리가 차를 타고 지나갈 때 회색으로 펼쳐져 있던 하늘이 위로 올라가는—뚜렷하지는 않았지만 올라갔다—것처럼 보였다. 위로 올라가면서 점점 옅어지는 느낌, 푸른색이 살짝 스친 회색, 초록 잎이 무성한 나무, 모두 더없이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알라딘 eBook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중에서 - P34

우리는 서로 예의를 갖춰 말했지만 나는 늘 마음이 불편했고, 창으로 크라이슬러 빌딩의 환한 불빛이 흘러들어오는 그 병원 침대 발치에 엄마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가족 중 어느 누구도 보지 못했다.

-알라딘 eBook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중에서 - P37

"사람들이란." 내가 말했다.
"사람들이란." 엄마가 말했다.
나는 정말로 행복했다. 오, 엄마와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나는 행복했다!

-알라딘 eBook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중에서 - P40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내 겉은 풍족해 보여도 속은 외롭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 같다. 외로움은 내가 맛본 인생의 첫맛이었고, 늘 그 자리에, 내 입안의 틈 속에 숨어 있다가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주었다. 그날 그는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친절했다. "그러네요." 그는 그렇게만 말했다.

-알라딘 eBook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중에서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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