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가 얘기한 것은 미래의 동성애가 아니었다. 그에 대해 알았거나 생각해봤다면, 보통의 연애질보다 더욱더 농담 같은 일, 더욱더 기괴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녀가 역겨워한 것은 사랑이었다. 예속과 자기비하와 자기기만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녀는 바로 그 위험을 보았고 허점을 읽었다. 앞뒤를 가리지 않는 희망, 열의, 바람.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69

로즈는 전쟁기와 그 이전의 웨스트핸래티를 생각하면 그 두 기간이 너무도 판이해서 마치 그곳이 완전히 다른 조명 아래 놓인 것처럼, 혹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화한 필름에 담긴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하여 한쪽은 모든 것이 선명하고 단정하고 한정적이고 평범해 보이는 반면, 다른 한쪽은 어둡고 흐릿하고 무질서하고 심란해 보이는 듯했다.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71

로즈는 시내 아이들의 줄 뒤에 들러붙었다. 웨스트핸래티를 대표하는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출신지를 무시하고 시내 학생들과 나란히 설 수 있기를, 와플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아침식사용 간이식탁을 따로 구비한 초연하고 유식한 무리에 붙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74

꽃가루처럼 가벼운 ‘퍼프드 라이스’를 연중 처음으로 대접에 쏟아붓는 아침은 흥겹고 신나는 시간이었다. 처음으로 고무 덧신을 신지 않고 단단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된 날처럼, 혹은 서릿발과 파리떼 사이에 낀 잠깐 동안의 좋은 날씨에 처음으로 문을 열어놓고 지낼 수 있게 된 날처럼.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74

로즈는 자신이 우월한 역할, 관찰자의 역할을 하지 않는 이야기는 결코 플로에게 하지 않았다. 곤경은 다른 사람들의 몫이다, 플로와 로즈는 그렇게 합의했다. 로즈가 현장을 떠나 다리를 건너며 사건의 기록자로 탈바꿈할 때 그녀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놀라운 것이었다. 신경과민은 싹 사라졌다. 커다랗고 회의적인 목소리, 빨간색과 노란색 체크무늬 치마를 입고 엉덩이를 살살 흔들며 완연히 거들먹거리는 발걸음.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77

로즈는 저녁마다 책을 한아름씩 집으로 가지고 왔다. 라틴어, 대수, 고대 및 중세 역사, 프랑스어, 지리. 『베니스의 상인』 『두 도시 이야기』 『단시 모음집』 『맥베스』. 플로는 다른 모든 책에 대해 그런 것처럼 그 책들에도 반감을 보였다. 책이 무겁고 클수록, 장정이 어둡고 음침할수록, 제목의 글이 길고 어려울수록 반감은 커지는 듯했다.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83

진짜 문제는 아버지가 스스로에게서 최악이라고 보았음이 분명한 품성들을 그녀 또한 지녔고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자기 안에서 계속 억누르고 가라앉힐 수 있었던 성향들이 딸에게서 다시 떠올랐고 게다가 딸은 그것을 물리치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동경과 공상에 빠지곤 했으며 헛된 자부심을 품고 뽐내기를 좋아했다. 삶 전체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흘러갔다.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86

그는 딸이 다르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 본모습 그대로이기를 바란다는 것이 진실, 최종적인 진실이었다. 적어도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랬다. 당연히 아버지는 그런 마음을 계속 부정해야 했다. 겸양 때문에 그래야만 했다. 그리고 비뚤어진 마음 때문에. 비뚤어진 겸양. 또한 그는 플로와 의견이 잘 맞는 것처럼 보여야만 했다.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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