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집에 잘 돌아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무슨 얘기라도 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내게 전화하지 않았고 나도 그녀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그녀는 자신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됐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어떤 것도 듣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건 실수였을 수도 있었다. 다른 사람의 검사 결과가 그녀에게 왔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녀에게는 내 차가 있고, 그녀의 집에는 내 물건들이 있다. 우리가 다시 보게 되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알라딘 eBook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중에서 - P184

나는 전화기로 가서, 십 센트짜리 동전을 넣고, 아내에게 수신자 부담으로 전화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전화를 받는 사람은 없다. 나는 여자친구에게 전화하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본 뒤, 전화번호를 누르다가 솔직히 그녀하고는 할말이 없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아마 집에 앉아서 그녀는 내가 본 것과 똑같은 TV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녀와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녀가 괜찮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혹시 뭔가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나는 알고 싶지 않다.

-알라딘 eBook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중에서 - P187

나는 J. P.가 그녀의 남자친구와 와이어커터에 대해 한 말들을 떠올린다. 결혼반지는 보이지 않는다. 여러 번 잘린 채로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나는 추측한다. 그녀의 손은 크고 손가락 관절은 굵다. 마음만 먹는다면 제대로 양 주먹을 쥘 수 있는 여자다.

-알라딘 eBook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중에서 - P188

나는 계단에 앉아서 담배에 불을 붙인다. 나는 손의 움직임을 바라본 뒤, 성냥불을 불어서 끈다. 경련이 있다. 오늘 아침부터 그러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 나는 뭔가 마시고 싶었다. 기분이 가라앉았지만, J. P.에게는 그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다른 걸 생각하려고 애쓴다.

-알라딘 eBook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중에서 - P190

그는 엄지손가락을 휙 치켜들어 태양을 가리킨다. 땀을 닦는 시늉을 한다. 그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내게 알려주려고 한다. 그 늙은 병신이 입을 벌리고 미소를 짓는다. 그제야 나는 내가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고개를 숙여 내 몸을 바라본다. 나는 다시 그를 바라보고 어깨를 으쓱한다. 뭘 기대했겠는가?
내 아내는 웃는다. "빨리," 그녀는 말한다. "침대로 돌아와. 지금 당장. 바로 지금. 침대로 돌아와."

-알라딘 eBook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중에서 - P192

나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낸다. 아내에게 먼저 걸어볼 작정이다. 만약 전화를 받는다면 해피 뉴 이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가 먼저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내가 어디에서 전화를 거는지 물어볼 테고 나는 말해야만 할 것이다. 새해의 결심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농담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그녀와 통화한 뒤, 나는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 것이다. 어쩌면 그녀에게 먼저 전화할지도 모르겠다. 나로서는 그녀의 아들이 전화를 받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여보세요, 자기야?" 그녀가 전화를 받으면 그렇게 말하리라. "나야."

-알라딘 eBook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중에서 - P193

그 여인의 이름은 미스 덴트. 그날 초저녁 그녀는 한 남자에게 총을 겨눴다. 그녀의 위협에 그 남자는 더러운 땅바닥에 엎드려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남자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르고 손가락에 낙엽이 잡히는 동안, 그녀는 리볼버를 겨눈 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얘기했다. 그녀는 그가 앞으로도 계속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짓밟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해시키려고 했다. "가만히 있어!"라고 그녀는 말했지만, 그 남자가 한 일이라고는 두려움 때문에 손가락을 땅바닥에 쑤셔넣고 다리를 조금 움직인 것뿐이었다. 말을 모두 마쳤을 때, 그러니까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그에게 말하고 난 뒤, 그녀는 그의 뒤통수에 발을 올리고 그의 얼굴을 땅바닥에 처박았다. 그러고는 리볼버를 핸드백에 넣고 기차역까지 걸어서 돌아갔다.

-알라딘 eBook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중에서 - P195

그들은 진하게 화장을 한, 장미꽃 색깔의 니트 드레스를 입은 중년 여인이 계단을 밟고 기차에 올라타는 것을 봤다. 그녀 뒤로 여름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입은 채 핸드백을 움켜쥔 아가씨가 올라왔다. 그다음에 기차에 오른 사람은 노인으로 아주 천천히, 나름대로 위엄을 갖춰 움직이고 있었다. 노인은 백발이었고 하얀 실크 크라바트를 매고 있었지만, 신발이 없었다. 승객들은 당연히 이 세 사람이 동행이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이 밤에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이 행복한 일은 아니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승객들은 살아오는 동안 그보다 더 희한한 일들도 봐왔다. 그들도 잘 알다시피 세상은 별의별 종류의 일들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이 일은 예상했던 것만큼 나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이 세 사람이 통로를 걸어 자기 자리를 잡는 동안—여인과 백발노인은 서로 나란히 앉았고, 핸드백을 든 아가씨는 몇 자리 뒤쪽에 앉았다—, 그들은 더이상 다른 생각으로 이어가지 않았다. 대신에 승객들은 역을 바라보며 그 역에 기차가 서기 전에 저마다 빠져들었던 생각, 그러니까 저마다의 문제들로 돌아갔다.

-알라딘 eBook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중에서 - P205

칼라일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6월 초 아내가 떠난 뒤로 여름 내내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얼마 전, 그러니까 일하던 고등학교에서 수업이 시작되기 얼마 전까지는 칼라일에게 아이를 돌볼 사람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그 자신이 아이를 돌봤으니까. 매일 밤낮으로 그는 아이들과 함께 지냈다.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긴 여행을 떠났다고 말했다.

-알라딘 eBook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중에서 - P207

전화를 끊은 뒤, 그는 마지막으로 한 말 대신에 좀더 고민해서 다른 말을 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얘기해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연애를 한 것도 아니었고, 그로서는 그렇게 부르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어쨌든 그는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는 그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요구도 하지 않았다.

-알라딘 eBook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중에서 - P212

그는 식탁 밑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무릎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얼굴이 다시 빨개졌다. 그녀는 눈을 치켜뜨고 식당 안을 둘러봤다. 하지만 누구도 두 사람을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그녀는 식탁 아래로 손을 내려 그의 손을 만졌다.

-알라딘 eBook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중에서 - P226

그가 손에 술잔을 들고 앉아 누군가와 결혼해서 친밀한 관계가 된다는 게 어떤 일이었나 기억하려고 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든 그는 전화선에서 들리는 미세한 잡음을 들으며 상대방이 자기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그게 아일린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알라딘 eBook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중에서 - P218

"칼라일, 당신을 둘러싼 모든 일들이 다 잘되고 있어. 나는 그렇다는 걸알거든. 당신은 내가 미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겠지만," 그녀가 말했다. "기억해주기만 하면 돼."

-알라딘 eBook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중에서 - P220

다음날 아침 알람이 울렸을 때, 그는 계속 눈을 감은 채 그때 꾸고 있던 꿈속에 머물러 있고 싶었다. 시골집이 나오는 꿈이었다. 거기에는 폭포도 있었다. 그로서는 잘 모르는 누군가가 뭔가를 들고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아마도 피크닉 바구니 같았다. 그는 그 꿈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꿈에는 편안한 감정이 있는 듯했다.

-알라딘 eBook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중에서 - P221

바로 그때 거리에서 덜컹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창문으로 가서 밖을 내다보기 위해 잔을 내려놓고 식탁에서 일어났다. 픽업트럭 한 대가 집 앞 연석 쪽에 바짝 붙어 있었다. 엔진이 공회전을 하자, 운전석이 흔들렸다. 칼라일은 현관문으로 가서 문을 열고 손을 흔들었다. 할머니가 손을 흔들더니 차에서 내렸다. 칼라일은 운전사가 몸을 웅크리고 대시보드 아래로 사라지는 모습을 봤다. 트럭은 헐떡대며 한번 더 흔들리더니 잠잠해졌다.

-알라딘 eBook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중에서 - P222

수채화를 가르치기로 돼 있는 다음 시간이 되자, 그는 이상하게 마음이 고요해지고 모든 걸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학생들의 손을 이끌며 "이렇게, 이렇게"라고 말했다. "섬세하게. 종이에다가 입김을 불듯이. 살짝 닿게만. 그렇지. 알겠지?"라고 말하면서 그는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암시가 가장 중요한 거야." 그는 수 콜빈의 손을 가볍게 잡고 붓질을 이끌며 말했다. "의도가 보이면 그건 그림을 잘못 그린 거야. 알겠니?"

-알라딘 eBook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중에서 - P225

그는 식탁 밑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무릎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얼굴이 다시 빨개졌다. 그녀는 눈을 치켜뜨고 식당 안을 둘러봤다. 하지만 누구도 두 사람을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그녀는 식탁 아래로 손을 내려 그의 손을 만졌다.

-알라딘 eBook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중에서 - P226

그녀는 이렇게 썼다. "진실로 맺어진 것은 절대로 다시 풀리지 않아." 칼라일은 그녀가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캘리포니아의 삶에 대해서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맺어진이라는 단어가 싫었다. 그 말이 두 사람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녀는 두 사람이 동업이라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런 식으로 얘기하다니 아일린이 완전히 넋이 빠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그 부분을 다시 한번 읽고 나서 편지를 구겨버렸다.

-알라딘 eBook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중에서 - P215

오랫동안 제 아내와 저는 서로 사랑했습니다. 이 세상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많이 말입니다. 그 사랑에는 저 아이들도 포함되지요. 우리는 생각했어요, 아니,알고 있었어요. 우리가 함께 나이가 들 것이라는 걸 말이죠. 우리가 원하는 일들을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해낼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 일들을 둘이서 함께 할 것이라는 것도요.

-알라딘 eBook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중에서 - P240

하지만 그는 이제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이해했고 그녀를 보낼 수 있다고 느꼈다. 그는 자신들이 함께한 인생이 자신이 말한 그대로 이뤄졌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그 인생은 이제 지나가고 있었다. 그 지나침은—비록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그는 맞서 싸우기까지 했지만—이제 그의 일부가 됐다. 그가 거쳐온 지난 인생의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알라딘 eBook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중에서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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