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는 아버지가 플로의 과장된 수사에 약간 반대하는 듯한, 약간 난감해하고 주저하는 듯한 기운을 감지한다. 하지만 거기에 기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며, 그녀도 그렇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로즈가 안다는 사실, 그리고 로즈가 안다는 것을 아버지가 안다는 사실은 상황을 호전시키지 않을 것이다.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34
그 소음은 모욕감과 패배감을 기꺼이 사력을 다해 드러낸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자기 역할을 연기하며 보여주는 지독함과 과장을 로즈 역시 똑같이 보여주며 자신의 역할을 연기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폭력의 피해자 역할에 마음껏 몰입한다. 그로써 그녀가 불러일으키는, 혹은 불러일으키기를 희망하는 감정은 마지막에 가서 아버지가 진저리치며 보여줄 경멸이다.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37
이미 진정된 상태로 접어들어, 무자비한 폭행도 다 끝난 일, 바꿀 수 없는 일로 느껴진다. 이런 상태에서는 사건과 가능성들이 멋진 단순성을 띠게 된다. 선택은 자비로울 만큼 명백하다. 어물쩍 얼버무리는 말은 전혀, 조건을 붙이는 말은 거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38
‘결코’라는 단어가 갑작스레 확고한 권리를 얻는다. 그들과 결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증오가 담기지 않은 눈길로는 결코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벌할 것이고 끝장내버릴 것이다. 이러한 결의와 온몸의 통증에 감싸인 채로 그녀는 자기 자신도, 책임도 초월하는 묘한 편안함 속에 둥실 떠 있다.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39
플로가 몸을 뒤집는 바로 그 순간, 로즈는 머릿속으로 비행선을 떠올렸다. 길고 투명한 거품 같은 몸체에 줄줄이 꿴 다이아몬드 불빛을 달고 기적 같은 미국의 하늘에 떠 있는 비행선.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