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땅에서는 성스러운 알프강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동굴을 빠져나가 땅 아래 암흑의 바다로 흘러갔다.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쿠블라 칸」
Where Alph, the sacred river, ran Through caverns measureless to man Down to a sunless sea. Samuel Taylor Coleridge, 「Kubla Khan」
-알라딘 eBook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중에서 - P7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 그 여름 해질녘, 우리는 달콤한 풀냄새를 맡으며 강을 거슬러올라갔다. 야트막한 물둑을 몇 번 건너고,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서 웅덩이에서 헤엄치는 가느다란 은빛 물고기들을 구경했다. 둘 다 조금 전부터 맨발이었다. 맑은 물이 복사뼈를 차갑게 씻어내고 강바닥의 잔모래가 발을 감쌌다―꿈속의 부드러운 구름처럼. 나는 열일곱 살, 너는 나보다 한 살 아래였다.
-알라딘 eBook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중에서 - P10
그런 시간에는 너에게도 나에게도 이름이 없다. 열일곱 살과 열여섯 살의 여름 해질녘, 강가 풀밭 위의 선명한 기억―오직 그것이 있을 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 위에 하나둘 별이 반짝일 테지만 별에도 이름은 없다. 이름을 지니지 않은 세계의 강가 풀밭 위에, 우리는 나란히 앉아 있다.
-알라딘 eBook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중에서 - P11
"도시는 높은 벽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어." 너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침묵의 밑바닥을 뒤져 말을 찾아 온다. 맨몸으로 심해에 내려가 진주를 캐는 사람처럼. "그다지 큰 도시는 아니야. 하지만 한눈에 다 들어올 만큼 작지도 않아."
-알라딘 eBook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중에서 - P11
그리고 만약 네가 정말로,진짜 나를 원한다면…… 그것이 그때 네가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던 말이다.
-알라딘 eBook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중에서 - P13
이실제 세계에서, 나와 너는 조금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 아주 멀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충동적으로 곧장 만나러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깝지도 않다. 전철을 두 번 갈아타고 한 시간 반쯤 걸려야 네가 사는 도시에 다다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도시는 어느 쪽도 높은 벽에 둘러싸여 있지 않다. 그러니 물론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알라딘 eBook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중에서 - P17
나나 너나 그전까지는 이렇게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자기 기분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터놓을 수 있는 상대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런 상대를 만났다는 건 실로 기적에 가깝게 느껴진다.
-알라딘 eBook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중에서 - P19
그 도시는 원래 네가 만들어낸 것이다. 혹은 네 안에 예전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걸 눈에 보이는 것, 말로 묘사할 수 있는 것으로 구축해내는 데는 나도 적잖이 힘을 보탰다고 생각한다.
-알라딘 eBook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중에서 - P20
그렇게 도시의 하루가 끝난다. 나날이 지나가고 계절이 바뀐다. 그러나 나날과 계절은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것이다. 도시의 본래 시간은 다른 곳에 있다.
-알라딘 eBook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중에서 - P26
너를 처음 만났던 때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장소는 ‘고등학생 에세이 대회’ 시상식장이었다. 5등까지 입상한 학생들이 그곳에 불려왔다. 나와 너는 3등과 4등으로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계절은 가을이고, 나는 그때 고등학교 2학년, 너는 아직 1학년이었다.
-알라딘 eBook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중에서 - P29
나는 특별히 글을 잘 쓰는 편이 아니다. 책 읽는 건 어릴 적부터 무척 좋아해서 틈날 때마다 손에 잡고 살았지만, 직접 글을 쓰는 재능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국어 시간에 우리 반 모두가 대회에 낼 에세이를 의무적으로 써야 했고, 그중 내가 쓴 글이 뽑혀서 심사위원회에 보내졌으며, 최종심사에 남더니 생각도 못한 높은 등수로 입상까지 했다. 솔직히 내 글의 어디가 그렇게 뛰어난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알라딘 eBook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중에서 - P30
평소 나는 그렇게 대담한 짓을 하지 않는다. 워낙에 낯을 가리는 성격이다(그리고 물론 겁쟁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대로 너와 헤어지고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엄청나게 잘못되고 전혀 공정하지 않은 일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용기를 끌어모아 큰맘먹고 행동에 나선다.
-알라딘 eBook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중에서 - P33
우리는 연인 사이였을까? 간단하게 그런 이름을 붙여도 될까? 나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나와 너는 적어도 그 시기, 일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서로의 마음을 티 없이 순수하게 한데 맺고 있었다. 이윽고 둘만의 특별한 비밀 세계를 만들어내고 함께 나누게 되었다―높은 벽에 둘러싸인 신비로운 도시를.
-알라딘 eBook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중에서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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