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방에 들어선 순간 눈에 들어온 건 내벽의 사면에 기대서 있는 서른 그루 남짓한 통나무들이다. 등신대가 아니다. 대체로 이 미터의 키를 훌쩍 넘겨, 내 몸집과 비슷한 몇몇 나무들은 비례상 열두 살 전후의 아이들처럼 보인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49
내가 없는 그곳에 인선이 있고, 그녀가 없는 이곳에 내가 있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61
인선의 손가락이 잘리지 않은 평행우주가 존재한다면 나는 지금 서울 근교 아파트의 침대에 웅크려 누워 있거나 책상 앞에 앉아 있을 거다. 인선은 싱글 매트리스에서 잠들어 있거나 안채의 부엌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거다. 암막 천에 덮인 새장 속 횃대에 아마가 발을 걸고 있을 거다. 잠든 몸이 어둠 속에서 따스할 거다. 가슴털 아래 심장이 규칙적으로 뛰고 있을 거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61
이제 더 할일이 없다.
몇 시간 후면 아마는 얼어붙을 거다. 2월이 올 때까지 썩지 않을 거다. 그러다 맹렬히 썩기 시작한다. 깃털 한줌과 구멍 뚫린 뼈들만 남을 때까지.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62
나중에 그 동굴을 찾아갔는데, 찾을 수 없었어요. 몇 번이나 기억을 더듬어서 가봤는데 실패했어요.
아니요. 꿈은 아니었습니다.
아홉 살 되던 겨울에 간 게 마지막이었어요.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64
이 섬의 동굴들은 입구가 작아요.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정도니까 돌로 가려놓으면 감쪽같은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놀랄 만큼 커집니다. 1948년 겨울엔 한마을 사람들이 모두 들어가 몸을 피한 곳도 있어요.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64
속솜허라. 동굴에서 아버지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에요.
양치잎 같은 그림자가 벽 위를 미끄러지며 소리 없이 솟아올랐다.
숨을 죽이라는 뜻이에요. 움직이지 말라는 겁니다.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는 거예요.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66
밤낫이 어신 거라이. 군사작전이라는 건. 어멍이 기다릴 건디. 내가 어멍이라는 말을 뱉은 순간 아버지의 몸 전체가 움찔 떨리는 걸, 전류가 옮겨온 것처럼 느낄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우릴 따라와서야 해신디.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67
1948년 미군 기록물이라는 자막 위로, 해안선에서부터 오 킬로미터를 표시하는 경계선이 두드러진 굵기로 그어져 있었다. 한라산을 포함하는 그 안쪽 지역을 소개疏開하며, 해당지를 통행하는 자를 폭도로 간주해 이유 불문 사살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이 자막으로 이어졌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68
더이상 길이 없는 산속으로 접어들면 나에게 등을 내밀어 업히라고 하고, 그때부턴 당신의 발자국만 쓸어내며 비탈을 올랐어요. 업힌 채로 나는 발자국들이 사라지는 걸 똑똑히 지켜봤어요. 마술 같았어요. 매 순간 하늘에서 떨어져내리는 사람들처럼, 우린 단 한 점의 발자국도 남기지 않으며 걷고 있었어요.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70
언젠가 어머니가 말한 적이 있어요. 느네 아방이 소나이다워시민 아마 내가 싫어실 거라. 처음 봐신디 소나이 얼굴이 얼마나 곱닥하던지. 십오 년을 햇빛을 못 봐난 그래나신가, 살갗이 버섯같이 히영했주게. 그런 사름을 다들 피하는 게 잘도 이상해서. 죽었던 사름이 돌아온 것추룩. 눈초리 한 번만 섞어도 귀신을 옮길 사름인 것추룩.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71
아버지가 그것들을 먹다가 문득 환상에서 빠져나오길 어머니는 바랐던 것 같아요. 그 방법이 정말 통하는 날도 있었어요. 내 손에서 귤을 건네받으며 아버지는 반쯤 웃었어요. 마치 두 세계를 사는 사람 같았어요. 한 눈으로는 나를 보고 다른 한 눈으론 내 몸 너머 다른 빛을 보는 것같이, 어두운 방인데도 부신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올려다봤어요.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72
그러나 마루를 짚고 몸을 일으킨다. 싱크대로 달려가 개수구에 토한다. 먹은 게 없으니 위액만 게워져 나온다. 약이 필요하다. 지금 나에게 없는, 넉넉히 조제받아 서울 집 책상 서랍에 넣어둔 약봉지 속 한 포가. 장기 복용시 심장을 해친다는 경고를 의사로부터 받은, 그러나 유일하게 듣는 약이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73
열이 오른다. 점점 더 몸이 떨린다. 살에 닿는 모든 게 차가워진다. 패딩 코트 소매의 겉감이 손목을 스칠 때마다 얼음 날에 베이는 것 같다. 패딩을 벗는다. 시계도 풀어 벽으로 밀어놓는다. 욕실 세면대로 가서 위액을 더 토한다. 입속을 헹구고 비누로 손을 씻는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74
차가웠지. 아니, 부드러웠지. 나는 고쳐 중얼거린다. 돌같이 단단했지. 입술을 뗄 때마다 피에 젖은 얼굴이 소리 없이 입을 벌린다. 아니, 솜같이 가벼웠지.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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