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읽고 싶은 책 없어?" 나가는 길에 셰에라자드가 물었다. 딱히 없는 것 같다고 하바라는 대답했다. 그냥 당신의 그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다, 고 생각했지만 입 밖에는 내지 않았다. 입 밖에 내면 그다음 이야기를 영원히 들을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242
여자를 잃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현실에 편입되어 있으면서도 현실을 무효로 만들어주는 특수한 시간, 그것이 여자들이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셰에라자드는 그에게 그것을 넉넉히, 그야말로 무한정 내주었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243
그 남자는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았다. 카운터 제일 안쪽 의자. 물론 먼저 앉은 손님이 없다면 그렇다는 얘기지만 그 자리는 거의 예외 없이 비어 있었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246
비교적 이른 저녁 시간에 옆구리에 책을 끼고 와서는 카운터에 놓고 읽었다. 두툼한 단행본이다. 문고본을 읽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248
기노는 남자의 이름을 모른다. 남자는 그가 기노라고 불리는 것을 알고 있다. 가게 이름도 ‘기노’다. 남자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기노도 굳이 묻지 않았다. 그는 가게에 와서 맥주와 위스키를 마시고, 말없이 책을 읽고, 현금으로 계산하고 가는 단골손님에 지나지 않는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249
손님이 전혀 오지 않는 가게에서 기노는 오랜만에 마음껏 음악을 듣고, 읽고 싶던 책을 읽었다. 바짝 마른 땅이 빗물을 빨아들이듯 지극히 자연스럽게 고독과 침묵과 적막을 받아들였다. 아트 테이텀의 피아노 솔로 음반을 자주 들었다. 현재 그의 심경과 잘 어울리는 음악이었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256
인간이 품는 감정 중 질투심과 자존심만큼 골치 아픈 것도 아마 없을 것이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270
눈을 감자 무수한 암갈색 화상 자국이 그녀의 매끈하고 하얀 등 위에서 살아 있는 곤충떼처럼 꿈틀거리며 제각각 원하는 방향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그는 그 불길한 이미지를 떨쳐내려고 고개를 몇 번 좌우로 작게 흔들었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283
하지만 옳지 않은 일을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경우도 이 세상에는 있습니다. 그런 공백을 샛길처럼 이용하는 자도 있어요.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291
가미타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명심하십시오. 되도록 멀리 떠나고, 되도록 자주 이동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는 반드시 그림엽서를 보내주세요. 그러면 기노 씨가 무사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293
기노는 그날 밤 여행가방을 꾸렸다.이다음 긴 비가 내리기 전에 이곳을 떠나는 게 좋다. 그것은 너무도 느닷없는 통보였다. 설명도 없을뿐더러 전후 사정도 불명확하다. 하지만 기노는 가미타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매우 난폭한 이야기였지만 의심할 마음은 왠지 생기지 않았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295
나는 상처받아야 할 때 충분히 상처받지 않았다, 고 기노는 인정했다. 진짜 아픔을 느껴야 할 때 나는 결정적인 감각을 억눌러버렸다. 통절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진실과 정면으로 맞서기를 회피하고, 그 결과 이렇게 알맹이 없이 텅 빈 마음을 떠안게 되었다. 뱀들은 그 장소를 손에 넣고 차갑게 박동하는 그들의 심장을 거기에 감춰두려 하고 있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303
상상한다는 두뇌활동 자체를 지워버려야 한다. 어쨌든 나는그것을 내 눈으로 차마 볼 수 없다. 아무리 텅 비었을지라도 그것은 아직까지는 나의 마음이다. 어렴풋하게나마 거기에는 사람들의 온기가 남아 있다. 몇 가지 개인적인 기억이 바닷가 말뚝에 엉킨 해초처럼 말없이 만조를 기다리고 있다. 몇 가지 감정은 베어내면 필시 붉은 피를 흘리리라. 아직은 그 마음을 영문 모를 곳으로 떠나보내 헤매게 할 수는 없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306
풍성한 초록 가지를 땅 가까이까지 늘어뜨린 버드나무의 모습을 기노는 머릿속에 떠올렸다.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아담한 앞마당에 드리워주었다. 비 오는 날에는 무수한 은빛 물방울이 부드러운 가지에 맺혀 반짝였다. 바람 없는 날 그것은 깊고 조용한 사색에 잠기고, 바람 부는 날이면 미처 정하지 못한 마음을 정처 없이 뒤흔들었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307
하지만 시간은 그 움직임을 좀체 공평하게 결정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욕망의 무게가, 회한의 녹슨 닻이, 본래의 합당한 시간 흐름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곳에서 시간은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화살이 아니었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309
초여름 바람을 받아 버드나무 가지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기노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작고 어두운 방 한 칸에서 누군가의 따스한 손이 그의 손을 향해 다가와 포개지려 했다. 기노는 눈을 꼭 감은 채 그 살갗의 온기를 생각하고 부드럽고 도도록한 살집을 생각했다. 그것은 그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것이었다. 꽤 오랫동안 그에게서 멀어져 있던 것이었다.그래,나는 상처받았다,그것도 몹시 깊이. 기노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 어둡고 조용한 방안에서. 그동안에도 비는 끊임없이, 싸늘하게 세상을 적셨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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