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술에는 취향이 있는 법이고, 모름지기 인간은 제 취향대로 술을 마셔야 하는 법이다. 상사 눈치 보며 직장생활하는 것도 죽을 맛인데 술자리에서까지 남의 눈치를 봐서야 되겠는가? 나는 눈치 봐야 하는 술자리를 좋아하지 않고, 제가 마시는 술이 맛있다며 강제로 권하는 어떤 사람과도 친하게 지내지 않는다. 건배를 강요하는 사람도 내 지인 중에는 없다. 각자가 좋아하는 술을 각자의 페이스대로! 이것이 나와 지인들 술자리의 기본 원칙이다. -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622896 - P106
우리 동인들 사이에서 A는 거실문학의 대가로 불렸다. 소설 속 주인공이 좀처럼 거실을 떠나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벗어나긴 했다. 거실에서 부엌으로! 우리는 선언했다. 이제 A의 문학은 거실을 극복하여 부엌으로 입성했노라고. 키친문학의 입봉작이었던 그 소설이 아직도 기억난다. 돈 버는 데 재주가 없어 늘 기죽어 사는 소설 속 주인공은 싱크대에 잔뜩 쌓여 있는 설거짓감에 자꾸 신경이 쓰인다. 그런데도 그는 함부로 설거지를 시도하지 못한다. 자칫해서 말실수라도 했다가는 시키지도 않은 설거지 좀 했다고 유세 떠느냐는 구박을 받을 것 같기 때문이다. 원래 소심한데다 돈 못 벌어 더 소심해진 남편의 심리를 A는 무려 A4 두 장에 걸쳐 묘사했다. 참으로 섬세한 심리소설이었다. -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622896 - P119
"응! 언니는, 존나 빠른 달팽이야!"
이런 젠장. 달팽이가 존나 빨라 봤자 얼마나 갈 수 있겠는가. 작가로서의 내 인생이 빤히 보이는 것 같았다. 그날 존나 빠른 달팽이는 시바스리갈 700밀리 한 병을 다 비우고 꽐라가 되었다. 가관이었겠지만 뭐 괜찮다. 아무도 보지 못했으니까. 유일한 목격자인 A는 맥주 세 캔에 취해서 나보다 빨리 기억이 끊겼고, 내 기억도 끊겼으니, 뭐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쿨하게. 어디에 가닿건 존나 빨리는 달려보자, 그게 그날의 결론이었다. -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622896 - P137
히비끼 30년산은 묘한 술이었다. 부드러운데 향은 매우 강했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단맛이 부드럽게 혀를 감쌌다. 그날의 분위기와 묘하게 어울리는 맛이었다. 치과의사가 무서웠다는 야쿠자, 유부남 꼬붕과 바람나 임신한 딸아이 때문에 주먹 대신 돈 보따리를 안기는 야쿠자, 인간 세계의 밖에 있을 것 같은 그도 결국은 인간이었다. 어쩔 수 없이 꼬붕을 이혼시켰지만, 덕분에 그의 딸은 탈 없이 애아빠와 살게 되겠지만, 그게 속상해 위스키를 물잔으로 완샷하는 그가 나는 어쩐지 이웃집 아저씨처럼 친근했다. 한쪽에서는 야쿠자인지 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나이들이 근엄한 모습으로 얼굴도 본 적 없는 친구의 아버지 제사를 모시고, 한쪽에서는 야쿠자 아저씨가 딸과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히비끼를 물 마시듯 마시고, 그 풍경이 강하면서 부드러운 히비끼와 참으로 절묘하게 어울리는, 오사카의 첫 밤이었다. -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622896 - P145
"내 인생에 빠꾸는 없다!"
그 말은 A의 집에도 걸려 있었다. A의 좌우명이라고 했다. 서예깨나 한다는 프로의 솜씨 같았는데, 빠꾸라는, 좌우명에는 어울리지 않는 생경한 표현이 우스워 혼자 키득거렸다. 그래도 나는 ‘빠꾸는 없다’는 표현이 ‘후회는 없다’는 말의 싸구려 버전이라고 짐작했다. 실생활에서 진짜로 빠꾸를 하지 않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A는 정말로 절대 빠꾸를 하지 않는다. -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622896 - P148
그런데 복어는, 비싼 데다 손질하기 어려워 먹고 싶어도 먹을 데가 흔치 않다는 복사시미는, 맛있었다. 엄청! 역시 나는 가난한 공주가 맞다. 나는 주로 이런 게 맛있다. 회장님들이 사주신 제비집이나 샥스핀이나 복사시미가. 회장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절대 먹을 수 없는. 당연히 그 뒤로 복사시미를 먹지 못했다. -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622896 - P150
술꾼들의 내밀한 욕망인가, 어리석음인가. 숙취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장을 한다. 그런데 해장은 반드시 술을 부른다. 하여 숙취에 숙취를 더한다. 우리 또한 어리석어 운전자를 제외한 A와 나는 해장을 하며 다시 술을 마셨다. 밥집이니 당연히 소주였다. 두 병을 채 마시지 못했는데 취기가 흥건히 올라왔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B가 가자며 우리를 부추겼다. 실은 B도 술을 마시고 싶었던 거다. 빨리 운전을 끝내고 집에서. -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622896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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