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꿈속에서 아내가 웃고 있었다. 잠깐 한순간 보인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잠이 깬 뒤까지 그 얼굴은 끈질기게 뇌리에 엉겨 붙었다. 보통 때의 꿈이라면 아침 햇살에 의식이 차츰 뚜렷해지면서 허망할 만큼 깨끗이 사라지는데 몇십 년 만인지 모를 아내의 얼굴은 거꾸로 빛을 얻어 양화陽畵 (음화陰畵를 인화지에 박은 사진으로, 색채나 명암이 실물과 동일하게 나타난다) 로 도드라지는 필름처럼 선명해졌다. - <백광>, 렌조 미키히코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621558 - P6
일흔 살 넘어 최근 몇 년 동안, 잠은 강물처럼 탁해졌다. 잠의 깊이가 강처럼 변한 것이다. 얕은 잠은 탁한 개울물이나 겨우 헤적거리는 것 같고, 깊은 잠은 어두운 강 밑바닥으로 잠겨 들면서도 완전히 가라앉지 못한 채 깊고 무거운 진흙 같은 물속에 반쯤은 묻히고 반쯤은 떠 있었다. 바닥까지 가라앉으면 그건 곧 죽음이고 두 번 다시 이 깊디깊은 잠에서 떠오를 수 없으리라…. 눈을 뜨면 매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눈을 떴는데도 의식이 아직 흙탕물 속이어서 이게 바로 죽음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 <백광>, 렌조 미키히코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621558 - P7
별 여한도 없고 죽는 건 조금도 두렵지 않다. 지금도 이렇게 눈을 감은 채 죽을 수 있다면 그게 가장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행복하다는 느낌 따위도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 나뭇잎이 시들어 어느 날 어느 순간 가지에서 뚝 떨어지듯이 죽을 수 있을 것 같다. - <백광>, 렌조 미키히코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621558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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