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모스크바로 가고 있다…… 수첩에 적힌 몇 줄의 내용. 그것이 내가 니나 야코블레브나 비시넵스카야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다. 열일곱 살에 참전해 5군단 32 전차여단 제1대대에서 위생사관으로 복무했다는 것. 그녀는 그 유명한 프로호롭카 전차전*에도 나가 싸웠다. 소련과 독일, 양 진영은 1200대의 탱크와 자주포를 총동원했다. 그것은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던 전차전 중의 하나였다. - P161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우리는 길과 대화의 사람들이라는걸...... - P163
이후에도 나는 한 사람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이 두 진실과 적잖은 갈등을 겪어야 했다. 의식 저 밑으로 쫓아버린 사실 그대로의 진실과 시간의 흔적이 스며든 공통의 진실, 신문 냄새가 폴폴 나는 공통의 진실. 첫번째 진실은 두번째 진실의 맹렬한 공격 앞에 맥없이 무릎을 꿇었다. - P187
그리고 청중을 위한 또하나의 전쟁을 그녀는 준비해두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똑같은 전쟁을 신문에서 떠드는, 영웅들과 공훈이 주인공인 전쟁. 젊은이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훈육의 전쟁. 평범하고 인간적인 것에 대한 이 불신에, 보통의 삶을 소위 이상이라는 것과 슬쩍 바꿔치기하려는 이 욕망에 나는 매번 충격을 받았다. 평범한 온기를 차디찬 광채와 맞바꾸려는 욕망에. - P188
어쩌면 우리는 수시로 전쟁과 혁명을 치르느라 과거와 연대하며 혈통의 그물을 엮어가는 법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오래전 과거를 돌아보는 법도, 그 과거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는 법도 우리는 서둘러 잊었고 서둘러 흔적들을 지워버렸다. 소중히 간직한 증언들이 생명을 위협하는 유죄의 증거가 될 수도 있었기에. 할머니, 할아버지, 딱 거기까지만 알고 누구도 그 이상의 조상은 알지 못한다. 뿌리를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 역사는 만들어졌지만, 낮뿐인 삶이었으며 기억도 짧았다. - P192
헤어지기 전에 피로그가 담긴 봉투를 내 손에 쥐여준다. "이건 시베리아 피로그야. 특별하지. 이 피로그는 돈 주고도 못 사……" 그리고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긴 명단도 건넨다. "당신이 연락하면 다들 기뻐할거야. 기다리고들 있어. 그 일을 떠올리는 건 끔찍하지만 그 일을 기억하지 않는 게 더 끔찍하거든." 이제 알겠다. 그들이 결국은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를…… - P225
편지 한 통이 기억난다. 발신인 주소가 없던 편지…… "우리 남편은 명예훈장 수훈자인데도 전쟁 끝나고 10년간 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어요…… 목숨 걸고 자신을 지켜낸 영웅들을, 조국은 그렇 게 대접했죠. 승리의 주역들! 대학 동기에게 보낸 남편의 편지가 문제였어요. ‘나는 우리의 승리를 자랑스러워할 수가 없네. 러시아인들의 시체로 우리 땅과 적의 땅을 뒤덮고 얻은 승리는 우리의 피로 물든 승리는 말일세.‘ 남편은 곧바로 체포되었죠・・・・・・ 견장도 뺏기고…… 스탈린이 죽고 나서야 남편은 카자흐스탄에서 돌아올 수 있었어요…… 병든 몸으로, 우리는 아이도 없죠. 나는 전쟁을 회상할 필요가없어요. 지금도 내 모든 삶이 전쟁중이니까……" - P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