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나저제나 나는 인복과 술복 하나는 끝내준다. 빨치산이었던 내 어머니는 모든 복을 명(命)으로 받아 98세 넘도록 정정하시다. 세상의 복은 이렇게나 다양한 것이다. 그러니 돈복, 부모복 없다고 좌절하지들 마시길. -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622896 - P27
어쩌면 그날의 시바스리갈은 가난과 슬픔과 좌절로 점철된 나의 지난 시간과의 작별이었다. 짜릿하고 달콤했던 건 위스키의 맛이 아니라 고통스러웠던 지난날과의 작별의 맛이었을지 모른다. 그날로부터 나의 변절과 타락이 시작되었다. 참으로 감사한 날이지 아니한가! -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622896 - P28
내 예감이 옳았다. 영원할 것 같던 청춘은 참으로 짧았다. 우울하다,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한탄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청춘이 아니었다. -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622896 - P33
초승달 달빛 아래 신비로운 어둠의 정령 같았던 나무들이 짙푸른 제 모습을 드러냈다. 푸르다 못해 시커먼 호두 한 알이 눈에 띄었다. 어쩐지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같았다. 논리적인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그냥 시커먼 호두 한 알이 내 눈에 들어왔을 때 우리들의 축제의 밤이 끝났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깨달았을 뿐이다. 호기심 어린 독자들께서 뻔한 상상을 하지는 않을 테지. 내가 말술임을 확인했을 뿐 그날 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622896 - P40
나는 아직도 A가 겪고 있는 불행의 긴 터널을 A처럼 담담하게 직시할 수가 없다. 그래서 A와 술 마시는 게 즐겁지 않다. 가슴이 먹먹하고, 알 수 없는 무엇엔가 화가 치민다. 그 여름밤, A가 직접 만든 밤나무 위 오두막에서의 그 하룻밤이 사무치게 그립다. 그때의 싱그럽던, 똑똑하던, 깔끔하던, 능청스럽던 스물두엇의 A도 눈물겹게 그립다. -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622896 - P43
먹이사슬로부터 해방된 초원의 단 하루, 이것이 술의 힘이다. 최초로 술을 받아들인 우리의 조상도 아프리카 초원의 저 동물들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해마다 돌아오는 해방의 하루. 숙취의 고통을 알면서도, 술 깬 직후의 겸연쩍음을 알면서도, 동물들은 그날의 해방감을 잊을 수 없어 또다시 몰려드는 것일 테다. -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622896 - P55
내가 말을 놓은 것은 고졸이라 우습게 봐서가 아니었다. 고졸을 우습게 보다니! 내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내 아버지는 국졸이다. 엄마 역시 국졸. 좋아하는 작가 고리키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잭 런던은 학교도 다니지 못한 채 열두 살부터 하루 열여덟 시간씩 통조림공장에서 일하다 작가가 되었고, 내가 최근 가장 사랑하는 마루야마 겐지도 대학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도 훌륭하다. 배운 누구보다 훌륭하다. -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622896 - P58
어느 날, 한 제자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판화가를 한 분 모셔 왔다. 나는 원래 예술가와 별로 안 친하다. 노동자, 농민과 가깝고, 부르주아와 차라리 더 가깝다. 아무튼 별로 할 말이 없어 그즈음 화제였던 어디 고졸이,의 전말을 알려줬다.
판화가가 돌아간 뒤 소포가 왔다. 뭔가 열어봤더니 근사한 편백나무에 떡하니 적혀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화려하고 멋진 필체로.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 -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622896 - P61
이만 원도 없는 주제에 A는 지금 그 럭셔리했던 산행을 추억하며 배시시 웃고 있는 것이었다. 1986년, A와 나에게 있어 럭셔리의 의미란 이런 거였다. 1. 산장에 도착하자마자 캔 맥주를 사서 할리우드 영화 속 아메리칸처럼 벌컥벌컥 뽀대나게 마신다. 2. 아침에 눈을 뜨면 산장 매점에 척 하니 돈을 내고 초코파이와 사이다를 사 빈속을 달랜다. 3. 부자인 듯 침낭을 각각 두 개씩 대여한다. 그 시절의 럭셔리는 이렇게나 소박했다, 소박하다 못해 하찮았다. -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622896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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