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부모님 이야기를 『빨치산의 딸』이라는 실록으로 쓰고 수배를 당했다. 책을 출판한 사장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적표현물 제작만이었으면 굳이 도망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전에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약칭)이라는 조직의 기관지 〈노동해방문학〉 기자로 2년 정도 일했는데, 그 조직이 반국가단체로 몰려 전 조직원에게 수배령이 내렸다. 함께 일하던 친구 대부분이 붙잡혀 7년 이상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622896 - P7
사실 패스포트는 내가 마신 최초의 위스키다. 그날, 지리산에서 위스키를 처음 마셨다. 물론 대학 시절 위스키인 줄 알고 캪틴큐를 마시기는 했었다. 캪틴큐는 마시는 누구라도 거의 혼절에 이르게 하는 기적의 술이다. 종일 지끈거리는 두통은 덤이다. 그게 자본주의 종주국 영국의 술, 위스키의 위력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캪틴큐는 기타재제주, 한마디로 화학약품이나 진배없었다. 돈도 없는 수배자 주제에 먹어보지도 않은 패스포트를 지리산행의 동반자로 삼은 이유는 간단하다. 맥주는 한겨울에 먹기에는 너무 차가울 뿐만 아니라 무겁기도 하고, 소주 또한 3박 4일의 일정을 버티려면 그 양과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독한 위스키라면 두 병으로 3박 4일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622896 - P11
다음 날, 우리는 모르는 사람으로 만났듯 모르는 사람으로 헤어졌다. 흐린 램프 아래 보았던 그들의 얼굴은 지금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들의 코펠 잔에 위스키를 따르던 순간의 안타까움, 나의 정체를 발각당한 순간의 당혹감, 모두가 같은 편, 모두가 위스키에 취했다는 기이한 연대의식만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를 뿐이다. 인생 최초의 위스키 패스포트는 내게 지리산의 겨울밤이다. 낯선 이들과 따스히 함께했던. -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622896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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