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유니스와 카야의 차이를 만든 건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환경의 유무일지도 모른다. 유니스가 고용주 식구를 몰살한 것은 전적으로 그들 간의 소통 부재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던 카야는 테이트를 통해, 어린 그를 보살펴준 잡화점 주인 점핑 부부를 통해, 뒤늦게 찾아온 조디 오빠를 통해 다시 세상과 힘겹게 손을 잡는다. 그런 이해와 소통에는 글자를 읽는 능력을 뛰어넘는 강력한 힘이 있음을 이 두 소설은 보여준다. - <소설의 쓸모>, 박산호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7163 - P23
어느 날 전쟁이 일어나 미국 정부가 무너지고 기독교 전체주의 집단이 권력을 잡는다. 그 결과 언제나 그래왔듯이 여성이 가장 심한 탄압을 받는다.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가장 먼저 취해진 조치는 여자들의 모든 은행 계좌를 막는 것이었다. 이 설정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이보다 더 효과적으로 한 인간의 운신의 폭을 좁힐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 <소설의 쓸모>, 박산호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7163 - P25
이민진은 미국 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마음에 항상 걸리는 것, 가장 수치스러워하는 것에 대해 써보라고 독려한다고 한다. 이렇게 쓰면 멋지겠지, 이런 이야기가 잘 팔리겠지, 싶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서 계속 떠나지 않는 것, 그것만 생각하면 쥐구멍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어지는 것에 대해 써보라고. 그러면 그 글을 끝까지 쓸 수 있고, 무엇보다 그런 글이 남들에게도 중요한 글, 읽고 싶은 글이 될 수 있다고. - <소설의 쓸모>, 박산호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7163 - P29
작가가 아닌 사람에게도 살아가면서 질문을 품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평소에 질문을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질문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소설을 읽어야 한다. 《시녀 이야기》를 읽으며 왜 여자는 이렇게 항상 아이를 낳는 도구가 되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을 품고, 《파친코》를 읽으며 국가적인 차별에 개인은 어떻게 맞서야 하나, 라는 질문을 떠올리고, 《제인 에어》를 읽으며 부잣집 남자와의 결혼이 성공한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라는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소설 읽기는 우리가 가보지 않은 길을 미리 안전하게 걸어볼 수 있게 해주는 지적인 시뮬레이션 게임과 같다. - <소설의 쓸모>, 박산호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7163 - P30
이제껏 경험한 적 없는 혼돈과 미지의 상황 앞에서 자포자기하지 않고 외계인, 이방인 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 등, 낯선 그들이 내민 손을 잡을 용기를 내는 사람만이 예상을 뛰어넘는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디히야가 웅덩이에서 뻗어나온 부드러운 덩굴손을 마주 잡았듯이.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소설가 정세랑의 단편 〈아라의 소설 1〉에 "어떤 모퉁이를 돌지 않으면 영원히 보이지 않는 풍경이 있으니까"《아라의 소설》, 34쪽, 정세랑 지음, 안온북스라는 문장이 있다. 살다 보면 한 번씩 돌아야 할 모퉁이가 있는 것이다. 그런 모퉁이를 돌 수 있는 용기는 남의 이야기, 즉 소설을 읽으면서 감동과 영감을 받을 때 더 쉽게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난 그렇게 해서 여러 개의 모퉁이를 돌아왔다. - <소설의 쓸모>, 박산호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7163 - P38
타인에 의해 규정되는 관계 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정체성이 아닌, 독립적으로 우뚝 설 수 있는 나의 정체성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카밀라는 행성이라는 정체성을 찾아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카밀라 역시 다른 여성들처럼 오랜 세월 동안 가족을 뒷바라지하다가 그들의 등 뒤에서 희미해진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아낸 것이다. 자신은 행성이라고. - <소설의 쓸모>, 박산호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7163 - P42
그 거주민들은 바로 우리에게서 샘솟는 새 아이디어, 새 생각, 새 발상, 새 철학이다. 그것은 생소해서 언뜻 보기엔 징그럽고 무서울 수 있고, 익숙해지기까지 괴로울 수 있다. 그러나 받아들이면 묵은 고통이 사라지고 편안해진다. 전통이나 관습이라는 것들이 그 묵은 고통을 만들어내 카밀라의 마음과 육체를 병들게 한 것이었다. 카밀라는 왜 그렇게 틈만 나면 옷을 훌훌 벗어 던지려 했을까. 옷 역시 카밀라를 옭아맨 기존의 사고방식, 사회적 통념, 남들의 시선에 대한 은유이기 때문이다. - <소설의 쓸모>, 박산호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7163 - P44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탐구하고 새로운 발상을 받아들이고 정체성을 찾는 것은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에서 엿볼 수 있듯이 쉽지 않은 일이 되겠지만, 그럼에도 시도해볼 가치가 있다. - <소설의 쓸모>, 박산호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7163 - P47
그런 맥락에서 소설 번역가는 대본을 받아 연기하는 연기자와 비슷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역할에 빙의했다’는 표현은 연기자뿐만 아니라 번역가에게도 해당할 수 있지 않을까. - <소설의 쓸모>, 박산호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7163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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