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무거워서 자꾸 뒤로 넘어지려고 하는데 왜 굳이 일어나 앉아 있으려고 하니. 율이에게 물었다. 네가 어디에 부딪칠까 봐, 넘어질까 봐 나도 계속 너를 보고 있어야 하잖아. 저거 봐, 너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너희 엄마 얼굴이 핼쑥해졌어. 이렇게 움직이면 한눈을 팔 수가 없잖아. 내가 너라면 누워 있을 수 있는 동안에는 계속 누워 있을 거야. 엄마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주려고 자는 척이라도 할 거야. 내 뒤통수가 납작한 건 내가 얌전한 아기였던 증거라고 했어. 우유는 하루에 세 번만 먹을 거야. 별것 아닌 일로 울지 않을 거야. 너희 엄마는 사는 동안 계속 네 걱정을 할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조금만 몸부림치고 조금만 아파야 해. 나도 그럴 거거든.
사람이라기보다는 그저 새로운 생명 그 자체 같은 아기 앞에서, 나는 건방지게 생각했다.
나는 너희 엄마가 나를 챙겨 준 것보다 너를 더 예뻐해 주려고. 네가 친구가 없어도, 선하지 않아도, 그런 거 상관없이 같이 놀아 줄게.

-알라딘 eBook <유원> (백온유 지음) 중에서 - P139

나는 우리가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다. 어른스러운 게 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자란다면, 수현과 함께라면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았다. 동시에 서글프다는 생각도 들었다. 서글픈 감정이라는 건 누군가에게 들은 적도 입 밖으로 꺼내 본 적도 없는 감정이었지만 왠지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느낌은 서글픔이라는 감정과 가장 가까울 것 같았다.

-알라딘 eBook <유원> (백온유 지음) 중에서 - P146

나는 한때 세상에서 나를 가장 미워했던 아이의 어깨에 기대어서 꿈을 꾸기 시작했다. 편안했다.

-알라딘 eBook <유원> (백온유 지음) 중에서 - P149

성적이 떨어진 이유에는 수현의 탓도 있는 것 같았다. 수현을 만나고부터 내 삶이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단순한 일상을 벗어나 이것저것을 하느라 시간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내 성적의 특징은 노력하는 것에 비해 획기적으로 오르진 않아도 잠시 한눈을 판다고 눈에 띄게 하락하지도 않는다는 거였는데. 은연중에 그걸 믿고 너무 마음대로 돌아다닌 것 같았다.

-알라딘 eBook <유원> (백온유 지음) 중에서 - P151

"아빠가…… 해로운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는 건 진짜 어려운 일이야.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나도 모르게 아빠의 행동에 이유를 찾아 주게 되거든. 아빠도 아빠다운 아빠의 사랑을 제대로 못 받고 자라서 그런 거라고, 혹은 한 번도 여유를 갖고 살아 보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살면서 누군가를 도와 본 게 처음이라, 은인이 되어 본 것도 처음이고 그런 식의 대접을 받아 본 것도 처음이라 거기서 아직까지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라고. 내 머릿속에서 자꾸만 아빠를 가련한 사람으로 만들거든."

-알라딘 eBook <유원> (백온유 지음) 중에서 - P154

수현은 아빠의 비겁함, 구질구질함, 위선, 아빠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아빠를 아이 달래듯 달래 가며 격려하고, 다독이는 것, 아빠에게 또다시 실망하는 일련의 일들에 지쳐 있었다.

-알라딘 eBook <유원> (백온유 지음) 중에서 - P155

"아빠 생각은 너보다 내가 더 많이 해 봤어. 궁극적인 질문은 이거지. 그래서 아빠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사람이기에 이럴 수 있는 걸까. 나는 왜 아빠의 다른 면을 보지 못한 걸까. 아빠는 왜 남들처럼 정직하게 살지 못하고, 누군가를 착취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지? 아빠 속이 궁금해, 나도. 아빠는 얼떨결에 널 구하고 영웅이 됐지. 아빠는 그날 널 구하지 않았던 게 아빠 인생을 위해서 더 나은 일이었을 수도 있어."

-알라딘 eBook <유원> (백온유 지음) 중에서 - P155

그러면 나는 죽었겠지. 잔인한 말이었지만 수현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화를 내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수현이겠지. 자신의 아빠를 참아 왔듯이 수현이 나라는 존재 또한 참아 왔음을 알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유원> (백온유 지음) 중에서 - P155

아저씨를 변호하려 애썼던 내 모습이 수현에게는 상처가 되었을 거라는 사실을 외면했다.
나는 아저씨가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이 아니기를 바랐는지도 몰랐다. 걸음걸이는 바뀌지 않더라도 아저씨의 삶이 바뀔 수는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야 내가 편하게 사니까. 눈에 띄지 않아야 마음이 편하니까. 이따금 아저씨가 휘청거리는 모습을 볼 때면 내 삶 전체가 기울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바랐다. 그게 수현에게는 잔혹한 일이라 할지라도.

-알라딘 eBook <유원> (백온유 지음) 중에서 - P156

죄책감의 문제는 미안함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합병증처럼 번진다는 데에 있다. 자괴감, 자책감, 우울감. 나를 방어하기 위한 무의식은 나 자신에 대한 분노를 금세 타인에 대한 분노로 옮겨 가게 했다. 그런 내가 너무 무거워서 휘청거릴 때마다 수현은 나를 부축해 주었다.

-알라딘 eBook <유원> (백온유 지음) 중에서 - P167

언니를 생각하니 언니가 내 위에 앉아 있었다.
"언니, 하나도 안 무섭지?"
"응."
나는 처음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언니의 용기를 닮고 싶었다. 이 모든 것들을 누리게 해 준 언니를.
나는 새롭게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알라딘 eBook <유원> (백온유 지음) 중에서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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