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도 뇌만큼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에드나 오브라이언
-알라딘 eBook <죽어가는 짐승>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중에서 - P7
그 아이는 팔 년 전에 알았지. 내 수업을 들었어. 나는 이제 전임이 아니고, 엄격히 말하면 문학은 전혀 가르치지 않아—지금까지 몇 년 동안 수업은 딱 하나만 했는데 ‘실제 비평’이라고 부르는 4학년 비평 쓰기 대형 세미나야. 내가 가르치는 반에는 여학생이 많이 와.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이것이 문학적 광채와 저널리즘의 광채를 매혹적으로 결합한 과목이라는 것 때문이고, 또하나는 내가 NPR*에서 서평을 하는 것을 들었거나 ‘서틴’**에서 문화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야. 지난 십오 년 동안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문화평론가 역할을 하면서 이 지역에서 상당히 알려지게 되었고 그래서 여학생들이 내 수업에 몰려오는 거지. 처음에는 텔레비전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십 분 동안 이야기를 하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지만, 결국 이 학생들에게는 그렇게 되고 있어. 이 학생들은 명성에 무력하게 이끌리고 있는 거지. 내 명성이란 거야 정말 별거 아니긴 하지만.
-알라딘 eBook <죽어가는 짐승>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중에서 - P9
내가 수업에서 그런 아이를 보면 그 ‘선생’이 ‘아가씨’로 바뀌지. 이제 팔 년이 된 일이야—나는 이미 예순둘이었고 그 아이, 콘수엘라 카스티요는 스물넷이었어. 그 아이는 나머지 학생들과는 달라. 학생처럼, 적어도 보통 학생처럼은 보이지 않아.
-알라딘 eBook <죽어가는 짐승>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중에서 - P10
그 몸은 아이에게 여전히 새로운 것이라 여전히 시험해보고 꼼꼼히 생각해보는 중인데, 장전된 총을 들고 거리를 걸으면서도 그것을 들고 나온 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선지 아니면 범죄자의 인생을 시작하려는 건지 아직 잘 모르는 애와 비슷한 면이 있는 셈이지.
-알라딘 eBook <죽어가는 짐승>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중에서 - P11
선한 마음, 예쁜 얼굴, 잡아끌면서도 거리를 두는 눈길, 멋진 젖가슴. 여자로서 갓 부화했기에 그 달걀 모양의 이마에 깨진 껍질 몇 조각이 붙어 있다 해도 놀라지 않았을 거야. 나는 즉시 이 아이가 내 여자가 될 것임을 알았어.
-알라딘 eBook <죽어가는 짐승>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중에서 - P12
콘수엘라 카스티요. 나는 그 아이를 보았고, 그 아이의 태도에 아주 강한 인상을 받았어. 그 아이는 자기 몸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알았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어.
-알라딘 eBook <죽어가는 짐승>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중에서 - P16
우리는 서재에서 서로 몇 인치 거리를 두고 서 있었는데 나는 아이에게 내가 가진 카프카 원고를 보여주던 참이었지—카프카가 손으로 쓴 이 세 페이지짜리 원고에는 그가 자신이 일하던 보험회사의 소장 퇴임 파티에서 한 연설이 적혀 있었어. 1910년에 쓴 이 원고는 몇 년 전 내 학생이자 애인이었던 서른 살의 부유한 유부녀가 준 선물이었지.
-알라딘 eBook <죽어가는 짐승>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중에서 - P17
마음이 흔들리는 그 십오 분 동안 우리 둘 다 뭔가 배웠지—아이는 처음으로 벨라스케스를, 그리고 나는 새삼스럽게 욕정의 즐거운 우둔함을. 이 모든 이야기! 나는 아이에게 카프카, 벨라스케스를 보여줘…… 왜 이런 짓을 할까? 글쎄, 뭔가는 해야 하니까. 이건 춤의 베일이야. 유혹과 혼동하지 마. 이건 유혹이 아니야. 여기서 감추고 있는 건 거기에 이르게 만든 것, 순수한 욕정이야. 베일은 눈먼 충동을 가려. 그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그 아이가 그러듯, 자기가 지금 다루고 있는 게 뭔지 안다는 잘못된 느낌을 받게 돼.
-알라딘 eBook <죽어가는 짐승>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중에서 - P21
사실 즐거움이 우리의 주제잖아. 자신의 수수하고 사적인 즐거움에 대해 어떻게 평생 진지한 태도를 유지할 것인가.
-알라딘 eBook <죽어가는 짐승>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중에서 - P28
질투. 불확실성. 아이의 몸 위에 올라가 있으면서도 아이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숱하게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도 한 번도 알지 못했던 강박. 콘수엘라와 함께 있을 땐 다른 누구와 있을 때와도 다르게, 자신감이 곧바로 쭉 빨려나가고 말았어.
-알라딘 eBook <죽어가는 짐승>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중에서 - P32
콘수엘라의 몸에는 눈에 확 띄는 두 가지가 있어. 우선 젖가슴. 내가 본 가장 찬란한 젖가슴—잊지 마, 나는 1930년에 태어났어. 난 지금까지 아주 많은 젖가슴을 봤어. 그런데 이 젖가슴은 둥글고, 풍만하고, 완벽했어. 받침접시 같은 젖꼭지가 달린 쪽이었지. 소의 젖통 같은 젖꼭지가 아니라 너무나도 자극적인, 장밋빛을 띤 연한 갈색의 큼지막한 젖꼭지. 두번째는 음모에 윤기가 반지르르 흐른다는 것이었어. 보통은 곱슬곱슬하잖아. 그런데 이건 아시아인의 털 같았어. 윤기가 흐르고, 납작하게 누웠고, 너무 무성하지도 않았어. 음모는 중요해. 그건 다시 나니까.
-알라딘 eBook <죽어가는 짐승>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중에서 - P33
사랑의 충만한 진실. 본능에 사로잡힌 여자아이가 자기 허영심의 제한된 공간과 더불어 아늑한 쿠바 가정이라는 포로 상태까지 박차고 나오는 것. 그것이 아이의 지배의 진정한 시작이었지—나의 지배를 계기로 시작된 지배였어. 아이가 나를 지배하도록 만든 사람은 바로 나였던 거지.
-알라딘 eBook <죽어가는 짐승>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중에서 - P37
노년이란 걸 이런 식으로 생각해봐. 생명이 위기에 처하는 것이 그냥 일상적인 상황이 되어버리는 거라고 말이야. 곧 마주치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걸 피할 도리가 없어. 영원히 자신을 둘러싸게 될 정적을. 그것만 빼면 모두 똑같아. 그것만 빼면 살아 있는 한 불멸이야.
-알라딘 eBook <죽어가는 짐승>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중에서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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