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더 나누기 위해 몰려간 곳은 영화제의 상영관이었던 씨네큐브 가까이에 위치한 ‘독립맥주공장’이었다. 독립맥주공장은 한적한 정동길 가운데에 있어서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숨은 보석 같은 곳이다. 한 여섯 가지 종류의 맥주를 사시사철 만들어내고 있는 탄탄한 마이크로브루어리이기도 하다. 포터와 세종, 라거, IPA 등 맥주 라인업이 다양한데다가 테이블 간격이 넓어서(은밀한 이야기 가능!) 시간을 두고 많은 맥주를 마시며 편안하게 머물 수 있다는 것이 이 공간의 특장점이 아닌가 싶다.

-알라딘 eBook <보가트가 사랑할 뻔한 맥주> (김효정 지음) 중에서 - P58

상호에 걸맞게 모든 맥주에 독립과 관련한 이름(예: ‘작은 소녀상’ 포터)이 붙어 있어 흥미로웠다. 이화학당을 거닐며는 일반적인 세종보다 풍미가 덜해서 라거에 가깝다고 느꼈지만 적당한 도수와 튀지 않는 상큼함이 꽤 마음에 들었다. 세종보다는 독특하고 매력적인 라거가 이 맥주의 정체성에 더 가까울 듯하다.

-알라딘 eBook <보가트가 사랑할 뻔한 맥주> (김효정 지음) 중에서 - P59

상영작 중 가장 특이했던 영화로는 〈하바나 셀피〉(알투로 산타나,2019)를 꼽는다. 여섯 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형식의 로맨틱 코미디이지만, 그 안에 뮤지컬과 웨스턴 등 다양한 장르가 혼재하는 어수선한 영화였다. 그럼에도 그 소란스러움의 이면이 놀라웠던 영화이기도 했다.

-알라딘 eBook <보가트가 사랑할 뻔한 맥주> (김효정 지음) 중에서 - P59

모두 영화에 관련된 대사인데 그 주체가 파졸리니●에서부터 펠리니●●까지 가벼운 코미디영화에서 마주칠 법한 수준은 아니다. 우디 앨런이 〈애니 홀〉(우디 앨런,1977)에서 마샬 맥루한●●●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이 대목에서 마샬 맥루한이 직접 카메오로 출연해 전설이 되었다) 늘어놓은 장면만큼이나 난감한 순간이다. 중요한 것은 비단 영화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문화적 레퍼런스의 수준뿐만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코미디적 장치로 쓰이는 요소들은 사실상 정치적 상징으로 기능한다.

-알라딘 eBook <보가트가 사랑할 뻔한 맥주> (김효정 지음) 중에서 - P60

또다른 영화, 〈죽은자들의 후안JuanoftheDead〉(알레한드로 브뤼게,2011)도 비슷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죽은자들의 후안〉은 조지 로메로의 〈시체들의 새벽DawnoftheDead〉(1978)을 패러디한 제목이 암시하듯, 좀비영화다.

-알라딘 eBook <보가트가 사랑할 뻔한 맥주> (김효정 지음) 중에서 - P61

그렇다. 미국은 쿠바영화에 있어서 모든 딜레마의 주인공이다. 〈죽은자들의 후안〉은 사회주의 국가의 좀비영화답게 후안이 미국행을 택한 친구들과 딸을 보내고 혼자 쿠바에 남는 것으로 끝난다. 이 대목에서 후안의 대사가 의미심장하다. "난 생존자야. 마리엘 난민사태와 앙골라 내전, 특별 시기 불황●도 다 버틴 사람이야. 이번에도 살아남겠지." 영화의 초반에서도 후안에 의해 반복되는 이 대사는 좀비영화가 아닌 프로파간다 영화의 엔딩과 더 어울릴 법하다(쿠바의 역사를 모르면 당황스러울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알라딘 eBook <보가트가 사랑할 뻔한 맥주> (김효정 지음) 중에서 - P62

나머지 여섯 편의 작품—〈우화〉 〈더 이상 예전이 아니다〉 〈율리〉 〈품행〉 〈결백〉 〈하바나 스테이션〉—역시 장르를 모두 달리하지만, 주인공들은 어느 순간 쿠바를 떠나 미국으로 갈 기회를 갈망하거나 주어진 기회에 대해 고민한다. 이는 카스트로 이후에 여러가지 위기를 겪은 쿠바의 현상황을 증거하는 잔재들이기도 하다.

-알라딘 eBook <보가트가 사랑할 뻔한 맥주> (김효정 지음) 중에서 - P63

미리 수집한 정보로 트라피스트(Trappist), 즉 수도원 제조 방식의 맥주를 만드는 곳인 줄은 알았지만 이런 곳이 제천에 있다는 점은 의아했다. 아마도 현재까지 트라피스트 스타일의 맥주를 만드는 브루어리는 국내에서도 제천의 솔티맥주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솔티맥주의 ‘솔티’는 양조장이 위치한 마을의 이름이다. 정겹고 고즈넉한 이름이지만 맥주맛만큼은 ‘수수’하지 않다. 내가 맛본 솔티맥주의 공통점은 향이 세련되고 밸런스가 훌륭하다는 점이었다. 예컨대 맥주가 갖추어야 할 홉향이나 과일향이 그대로 드러나면서도 말미에 상큼한 산미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이 끝맛이 다음 모금을 재촉한다.

-알라딘 eBook <보가트가 사랑할 뻔한 맥주> (김효정 지음) 중에서 - P71

POST SCRIPT 솔티펍은 음식을 팔지 않는다. 시장 안에(몇몇 점포들이 모여 있는 ‘모아키친’이나) 다른 점포들로부터 안주를 공수받는 시스템이다. 다양한 메뉴가 있지만, 이왕이면 맥주의 향을 즐길 수 있도록 최대한 ‘개성 없는’ 음식을 선택하기를 권한다.

-알라딘 eBook <보가트가 사랑할 뻔한 맥주> (김효정 지음) 중에서 - P73

웨일펍은 웨일 브루잉 컴퍼니에서 직영하는 펍이다(합정역 근처에 위치한 ‘발리 슈퍼스토어’ 역시 웨일 브루잉 컴퍼니에서 운영한다).

-알라딘 eBook <보가트가 사랑할 뻔한 맥주> (김효정 지음) 중에서 - P74

웨일 브루잉 컴퍼니의 페일 웨일(이름도, 라이밍도 귀엽지 않은가? 창백한 고래라니! 물론 내 멋대로 한 해석이다)은 무난한 페일에일이다. 무난한 맛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수많은 페일에일 중 무난하게 ‘맛있는’ 맥주를 찾기는 사실 쉽지 않다. 누구나 즐길 수 있을 만큼의 쓴맛(IBU41, 알코올 도수4.6%)과 맥주의 맛을 누르지 않는 수준의 시트러스한 향, 폭신하고 넉넉한 맥주 거품까지…… 본분에 충실한 맥주라서 적어도 두세 잔 이상 이어 마실 수 있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100분 노미호다이(일정 시간 동안 무제한으로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서비스)를 3만 원에 이용할 수 있는 이벤트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슬로우 드링커가 아니었다면 무조건 도전했을 것이다.

-알라딘 eBook <보가트가 사랑할 뻔한 맥주> (김효정 지음) 중에서 - P77

각본을 쓴 최인호는 〈바보들의 행진〉의 수록곡 중 하나인 〈고래사냥〉(작곡, 노래 송창식)의 작사를 맡기도 했다. 노래의 가사는 영철의 짧은 삶을 가사로 변환한 듯 염세적이고 우울하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로 시작하는 〈고래사냥〉은 영철이 청춘을 포기하고 바다로 뛰어들 때 흘러나온다. 이 노래는 후에 제작된 영화, 〈고래사냥〉(배창호,1984. 역시 최인호 작가가 각본을 썼다)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알라딘 eBook <보가트가 사랑할 뻔한 맥주> (김효정 지음) 중에서 - P79

고래는 슬픈 역사 속에서 배태된 문화적 아이콘이지만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나은 세상을 향한 염원이 체화된 신화적 존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속에 푸른 바다의 고래 한 마리 키우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라는 정호승의 시처럼 고래는 청춘들이 누리지 못한 생명력과 리비도의 모체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페일 웨일은 이 세상의 모든 주눅든 청춘에게 바치고 싶다. 그들의 마음 속 ‘고래’를 위하여, Cheers!
● 「고래를 위하여」,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열림원, 1998)

-알라딘 eBook <보가트가 사랑할 뻔한 맥주> (김효정 지음) 중에서 - P80

미스터리에는 다른 브루어리에서 찾기 쉽지 않은 독일식 밀맥주, ‘헤페 바이젠’이 있다. 이 책을 반 이상 읽은 독자라면 눈치챘겠지만, 바이젠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맥주 종류다. 헤페(Hefe)는 독일어로 ‘효모’를, 바이젠(Weizen)은 ‘밀’을 뜻한다. 따라서 헤페 바이젠은 효모가 살아 있는 밀맥주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미스터리의 헤페 바이젠은 바나나향이 강하다. 가장 대중적인 밀맥주, 파울라너나 블랑이 풍기는 시트러스 종류의 시큼함보다는 달달한 느낌의 바나나향에(실제로 달지는 않다) 카스테라처럼 부드러운 텍스처가 특징이다. 맥주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거품마저 맛있는 맥주라서 누구에게라도 추천할 만한 모범적인 맥주다.

-알라딘 eBook <보가트가 사랑할 뻔한 맥주> (김효정 지음) 중에서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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