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남자는 홀로 서 있었다. 그는 주위를 흘끔거리며 자신이 혼자 있음을 확인하고는 아름다운 만의 바닷물과 지는 해가 흩뿌리는 노을빛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잠깐 몸을 돌렸을 때 모래 위에 작은 나뭇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오래전 녹아버린 라임 맛 아이스크림의 가느다란 막대였다. 남자는 빙그레 웃으며 막대를 주워들었다. 남자는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며 혼자 있음을 확인하더니 몸을 숙이고 막대 쥔 손을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손을 가볍게 움직여 이 세상에서 그가 가장 잘 아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모래 위에 굉장한 형체를 그리기 시작했다. - <멜랑콜리의 묘약>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739784 - P17

편편한 모래밭에 그리스의 사자와 지중해의 염소, 금가루 같은 모래로 살집이 이루어진 처녀, 손으로 깎은 뿔피리를 부는 사티로스, 어린 양 떼와 함께 뛰놀며 바닷가를 따라 꽃을 뿌리고 춤을 추는 아이들, 하프와 리라를 연주하며 깡충깡충 뛰는 악사들, 저 멀리 초원과 숲과 버려진 사원과 화산을 향해 내달리는 젊은이들과 유니콘이 그려져 있었다. 남자의 손과 나무 막대는 단 한 군데도 끊기지 않는 선으로 해변을 따라 열정적으로 몸을 굽히고 땀을 비처럼 쏟으며 휘갈기다가, 매듭을 짓다가, 원을 그리다가, 위로 아래로 옆으로 안팎으로 움직이다가, 한땀 한땀 새기다가, 속삭이다가, 잠시 멈추었다가, 마치 태양이 바닷속으로 완전히 잠기기 전에 이 떠들썩한 여정을 화려하게 마무리해야 한다는 듯 이내 서둘러 다시 움직였다. 님프와 나무의 요정들이 이삼십 미터가 넘는 길이로 펼쳐지고 여름철 분수는 해독할 길 없는 상형문자를 그리며 솟구쳤다. 사위어가는 빛을 받은 모래는 이제 녹아내린 구리색이 되어 어느 시대, 어느 인간이 읽어도 오래오래 음미할 수 있을 어떤 메시지를 새기고 있었다. 모든 것이 각자의 바람과 중력 속에서 회오리치다 균형을 잡았다. 춤추는 포도주 상인 딸들의 포돗빛으로 물든 발 아래서 포도주가 짓눌려 흘러나오는가 하면, 꽃으로 꾸민 연들이 나부끼는 구름 위로 꽃향기를 흩뿌렸다. 그런가 하면 무럭무럭 김이 솟아오르는 바다에서 황금 칼집에 싸인 괴물이 태어났다. 그리고… 또… 이제….

화가가 동작을 멈추었다. - <멜랑콜리의 묘약>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739784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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