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 P9

파울 클레의 관찰 일기

사랑이나 이별의 깨끗한 얼굴을 내밀기 좋아한다
그러나 사랑의 신은 공중화장실 비누같이 닳은 얼굴을 하고서 내게 온다
두 손을 문지르며 사라질 때까지 경배하지만
찝찝한 기분은 지워지지 않는다

전쟁과 전쟁의 심벌즈는 내 유리 손가락, 붓에 담긴 온기와 확신을 깨버렸다
안녕 나의 죽은 친구들
우리의 어린 시절은 흩어지지 않고
작은 과일나무 언저리에 머물러 있다
그 시절 키 높이만큼 낮게 흐르는 구름 속으로 손을 넣으면
물감으로 쓸 만한 열매 몇 개쯤은 딸 수 있다, 아직도

여러 밝기의 붉은색과 고통들
그럴 때면 나폴리 여행에서 가져온 물고기의 색채를
기하학의 정원에 풀어놓기도 한다 - P29

봄여름가을겨울

작은 엽서처럼 네게로 갔다. 봉투도 비밀도 없이 전적으로 열린 채. 오후의 장미처럼 벌어져 여름비가 내렸다.
나는 네 밑에 있다. 네가 쏟은 커피에 젖은 냅킨처럼. 만개의 파란 전구가 마음에 켜진 듯. 가을이 왔다. 내 영혼은 잠옷 차림을 하고서 돌아다닌다. 맨홀 뚜껑 위에 쌓인눈을 맨발로 밟으며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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