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한국처럼 시외의 먼 야산에 주로 조성됐던 묘지가 근대에 들어 도시 안으로 들어오자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집 근처다 보니 기일이나 생일 같은 특별한 날뿐 아니라 매일 들르는 사람이 많아지고, 올 때마다 꽃이나 화분, 인형 같은 것을 놓아두고 자발적으로 묘소 주변 관리까지 하는 시민이 늘어났다. 그러자 묘지 특유의 우울하고 칙칙한 분위기는커녕 화원에 온 마냥 밝고 기분 좋은 공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시 또한 다수의 관리인과 자원봉사자를 두어 가족들이 두고 간 오래된 꽃을 치우고 정원수를 가꾸는 등 이런 변화를 촉진시켰다. 그 덕에 지금도 페르라세즈에는 팔짱 끼고 데이트 즐기는 연인들이나 유모차를 끌고 산책 나온 가족들을 자주 볼 수 있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95

이런 묘지 환경의 변화는 당연히 장례 분위기에 영향을 끼친다. 숙연하지만 슬프지만은 않은 따뜻한 분위기의 장례식에선 먼저 떠나는 가족에게 밝게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하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눈물과 웃음이 함께 터지는 이들의 장례식에 직접 참석해 보면 이들은 죽음을 한국인과는 분명 다르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상과 고립된 외딴곳에서 이루어지는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내일이라도 들르기만 한다면 집 가까이서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도시 속에 뿌리내린 공원묘지는 시민들의 죽음에 대한 태도마저 다르게 만들었다. 매일 마주하는 두려움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다. 두려움은 보이지 않을 때 지속된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97

장례 건축 미학architecture funéraire이라 불리는 이 특별한 개념은 다양한 양식과 형태의 건물로 가득한 도심지처럼 묘지도 다양하고 활력 넘치는 ‘살아 있는 도시의 축소판’처럼 보이게 한다. 묘지에 설치될 예술품이나 미니어처 건축물은 가족이 가장 신뢰하는 조각가와 건축가에게 맡기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내가 무언지 모르고 받았던 그 설계 의뢰는 앞으로 자신의 가족이 영원히 머물게 될 그 고객의 마지막 집에 대한 것이었다. 그가 떠나면 살아 있는 가족과 자손은 죽은 자의 무덤이 아닌, 가족의 집에 들르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묘지는 죽은 자들이 아닌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도시의 일부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98

쐐기돌 혹은 키스톤keystone이라 불리는 아치 상부 정중앙에 박혀 있는 돌이다. 이 돌이 중요한 이유는 양쪽에서 가운데로 쏟아지듯 기울어지는 부재들의 모든 무게를 혼자서 지탱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부분은 벽돌이나 석회석 같은 상대적으로 연성soft의 돌을 쓰더라도 이 쐐기돌만은 가장 단단한 돌을 써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좌우와 상부에서 쏟아지는 무게를 견디지 못할 거고, 만약에라도 이 쐐기돌에 금이라도 간다면 그간 만든 벽을 모두 허물고 처음부터 다시 쌓아야 했으니 그 중요성은 보이는 것 이상이었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103

‘풍수’는 ‘바람을 막고 물을 얻는다’는 뜻인 장풍득수藏風得水를 줄인 말로, 생명을 불어넣는 땅의 기운을 살피는 것이라고 한다. 수많은 미사여구가 있으나 한국인이 이렇게 바람과 물에 유난한 주의를 기울인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전통적으로 지어 왔던 건물이 물에 약한 목조 건축물이었기 때문이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110

배산임수가 일리가 있는 것은 높은 지형을 뒤로하고 강 같은 물이 앞에 있으면 대류 현상●으로 인해 잔잔한 바람이 지속적으로 생성되기 때문이다. 해변에서 시간에 따라 방향이 바뀌면서 항상 바람이 부는 이유와 유사하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111

근대에 들어 배산임수를 찾는 수요는 많은데 공급은 턱없이 부족하자 전통적 풍수지리설에는 강조되지 않던 보완적 개념이 등장한다. 바로 ‘향’이다. 혹독한 겨울에 북풍을 정면으로 맞을 수는 없으니 북쪽을 등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지붕 처마가 길게 나오는 한옥 건물에서는 바람에 비해 향은 크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서향이 여름 오후에 덥긴 해도 지붕 처마가 가려 주니 실내 공간에 크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고, 한옥의 모든 방은 직사광선이 아니라 마당에서 반사되는 간접광에 의지하는 구조였으므로 한옥은 향에 강하게 구속되는 집이 아니었다. 따라서 남향에 대한 집착도 없었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112

쐐기돌은 조적조●가 사라진 후에도 장식으로 남았다. 배산임수가 사라져도 남향은 남았을 뿐 아니라 주택 시장을 독점했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117

한국인이면 누구라도 떠올릴 수 있는 아파트의 구조는 거실과 안방은 남쪽, 두 개의 애들 방과 주방은 반대쪽인 북쪽에 배치된, 4인 가족 기준 32평 표준 평면이다. 일전에 인테리어 설계 의뢰를 해 온 한 가족에게 각각의 방에서 자신이 보내는 시간을 타임워치로 측정해 보게 한 적이 있다. 측정 결과는 그곳에 사는 사람조차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해가 드는 남쪽의 안방과 거실은 해가 진 후에나 비로소 사람이 들기 시작했고, 심지어 가장 좋은 자리의 안방은 저녁 10시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북쪽에 있는 주방과 아이들 방은 오후 내내 형광등을 켜 놓고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남향집이 아니라 북향집에 살고 있었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117

예전의 한옥은 가운데 마당에 비치는 자연광이 반사되어 모든 방에 빛이 골고루 퍼지는 구조였다. 동향이나 서향이라도 모든 방에 간접광이 비치니 별 상관없었다. 집을 굳이 ‘ㄱ’자나 ‘ㄷ’자로 만들었던 이유이자, 우리가 지금도 한옥의 툇마루에 앉았을 때 마음이 편해지는 진짜 이유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118

빛이 들지 않는 침침한 북쪽 공간으로 밀려난 사람은 하필이면 약자인 주부와 아이들이었고, 항시 밝은 남향 빛의 혜택을 입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커다란 티브이와 소파 그리고 킹사이즈 더블 침대였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119

특히 21세기 한국인의 절반이 살게 된 아파트는 오늘의 편리성, 환금성, 학군, 경제성 같은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욕망의 교집합이 만들어 낸 집합적 결과물이다. 그렇지만 그 선호의 기원은 그들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과 시골 할머니 집에서의 옛 기억에 뿌리를 두고 있고, 전통적인 가족관을 기초로 하고 있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122

한국인에게 안방이란 단어가 주는 어감은 단순히 잠을 자는 침실만을 뜻하지 않는다. 원래 전통 가옥에서 안방은 내방內房 또는 안채라 해서 가족 중 안주인을 위한 공간을 의미했다. 그래서 안방은 집의 가장 폐쇄적이고 신성한 방으로 간주되며, 대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배치됐고, 남편과 가족 외의 사람들은 허가 없이 안방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또 모든 집안일을 관리하기 위한 중심이었고, 모든 열쇠와 귀중품을 보관하는 곳이기도 했다. 안주인의 공간이라 부엌과 가까이 위치했으며 밥상을 나르거나 빠른 출입을 위해 쪽문으로 직접 연결되었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124

형식과 내용이 어긋나는 문화적 지체 현상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남쪽 공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부엌은 안방에서 먼 집 반대쪽으로 보내졌고, 식탁은 주방 옆에 따로 자리 잡았다. 가족들은 거실에 모여 텔레비전을 보게 되니 안방은 예전 가족실의 기능은 상실한 채 그야말로 밤에 잠만 자는 침실로 바뀌었다. 넓은 면적은 유지한 채 큰 침대와 장롱만 하루 종일 방을 지키는 기묘한 공간이 되고 만 것이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125

한옥의 마루는 마당과 바로 이어지는 공간이었으니 궂은 날에는 마당을 대신했고, 집을 외부와 연결시켜 주는 한옥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127

온돌溫突은 방바닥을 따뜻하게 하는 한국의 전통적인 가옥 난방 방법이다. 한옥의 아궁이에서 불을 피우고, 아궁이에서 생성된 열기를 머금은 뜨거운 연기가 방바닥에 깔린 구들장 밑을 지나면서 난방이 되고, 그 연기는 구들장 끝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방식이다. 서구에는 로마 시대에 뜨거운 공기로 바닥 밑을 데우는 히포카우스트hypocaust라는 유사한 난방 방식이 있었으나, 겨울이 상대적으로 혹독했던 한국의 기후에서 오랜 기간 발전해 지금까지 계승돼 왔다. 온돌은 음식을 하기 위해 지핀 불의 열기를 방의 난방에 재사용했기 때문에 땔감을 구할 수 없었던 긴 겨울 동안 최소한의 자원으로 요리와 난방을 병행할 수 있었고(난방이 필요 없는 여름에는 구들과 연결되지 않은 별도의 아궁이를 사용했다), 이런 방식은 집의 구조가 바뀐 근대에도 계승됐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132

방석과 이부자리와 밥상은 이 온돌이 만들어 놓은 필연적인 ‘쐐기돌’이었다. 그런데 실내에서도 신을 벗지 않는 서양식 입식 문화의 산물인 소파, 침대, 식탁이 수입되어 집을 점령하자, 익숙한 바닥 난방의 포근함을 포기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힘든 양반다리 하지 않고 허리에 무리를 주지 않는 입식 생활을 거부할 수도 없는 정신 분열적 상황을 맞이한다. 엉덩이에 전해지는 온기가 필요했으니 소파를 등받이로 쓰고 바닥에 앉았고, 따뜻한 공기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으니 으슬으슬한 몸을 ‘지지기’ 위해 침대 위에 전기장판을 깔고 잠을 청했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136

구들을 2층에까지 설치할 건축 방식이 없었으니 집은 단층으로만 지어졌고, 단층 건물로 도시를 만들 수는 없었으니 한국인은 19세기까지 1층만 있는 평면적인 ‘마을’에서만 살았다. 벽난로를 사용했던 서구나 실내 화덕을 사용했던 일본이 쉽게 다층식 건물을 지었던 이유는 난방 방식이 상대적으로 간단한 공기 난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건물을 여러 층으로 지을 수 있게 되자 상·하수 시스템과 엘리베이터 같은 기계 시스템도 덩달아 발전했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137

물론 건물을 고쳐 쓰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더 직접적인 원인은 실내를 바꿀 수 없는 벽식 구조 방식 때문이지만, 바닥 온돌도 톡톡히 한몫을 한다. 재건축으로 더 큰 집을 얻게 될 몇몇의 조합원과 일거리를 보장받을 건설 업체에게는 좋은 소식일지 몰라도 건물을 30년마다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은 비경제적일 뿐 아니라 무책임한 짓이다. 건축은 자연 자원을 오직 고갈시키기만 하는 소모적인 행위다. 우리 나라 건축 산업의 재활용 비율은 1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139

한국의 모든 방이 표면에 화학적 방수 처리가 된 강화마루나 석유화학 계열 장판류로 깔려 있는 이유다. 자연 원목이나 카펫, 패브릭, 바닥 벽돌, 다다미 같은 다양한 재료가 실내에 쓰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물청소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140

공간에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그 공간이 보이지 않는다. ‘쐐기돌 장식’은 우리 집 곳곳에 있다. 형식과 사용은 많은 부분 어긋나 있다. 인간은 딱 그만큼만 똑똑하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141

그런데 한국의 전통 건축이 다른 아시아 건축과 다른 점은 건물을 최대한 크게 지어 그 속에 여러 개의 방을 설치하는 것이 아닌, 건물 크기를 줄여 여러 채로 나누어 짓는 방법을 선호했다는 것이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1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