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체호프, 셔우드 앤더슨,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치버를 잇는 카버는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체, 일상의 균열에 대한 예민한 포착, 부서지기 쉬운 삶에 대한 객관적 시선, 허를 찌르는 응집된 폭발력으로 미국 소설의 ‘뉴웨이브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했다. 이런 별칭에 대해 카버는 "난 내 아이들의 아버지일 뿐"이라고 했다. - <레이먼드 카버>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4158 - P12
다른 말로는 안 돼. 왜냐면 딱 그거였거든. 그레이비. 그레이비, 지난 10년. 살아 있었고, 취하지 않았고, 일을 했고, 사랑했고, 또 훌륭한 여자에게 사랑받은. 11년 전에 사내는 이런 식으로 가다간 여섯 달 정도 더 살 거라는 소리를 들었지. 그때 사내는 내리막길로만 가고 있었어. 그래서 사내는 어찌어찌 사는 방법을 바꿨지. 사내는 술을 끊었어! 그리고 나머지는? 그 뒤로는 죄다 그레이비였어, 매 순간이, 사내가, 그러니까, 어떤 게 쪼개져서 다시 사내의 뇌 속에서 자라나고 있다는 그 말을 듣던 순간까지 포함해서. "날 위해 울지 마", 사내가 친구들한테 말했어. "난 운이 좋은 사람이야. 나나 다른 사람들 누구나 예상한 것보다 10년을 더 살았어. 진짜 그레이비지. 그걸 잊지 마." — 「그레이비」, 『폭포로 가는 새로운 길』, 118쪽 - <레이먼드 카버>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4158 - P26
육즙이란 따지고 보면 결국 날고기가 익는 과정에서 나오는 피와 기름을 비롯해 마치 땀을 흘리듯 배어나는 체액을 말하는 것일 텐데, 여기에 각종 양념을 더해 만드는 것이 그레이비다. 오래 구워지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육즙이 빠져나가게 되는 로스트는 그레이비를 곁들이지 않고는 그 풍미를 제대로 느끼기 어렵다. 그렇다, 그레이비는 저렴한 고기를 오래 구워서 나온 육즙을 주재료로 조리되며, 다시 그 저렴한 고기를 좀 더 먹을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 <레이먼드 카버>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4158 - P27
따지고 보면 고기가 구워지는 과정이란 열이 가해지면서 원래의 단백질 조직이 파괴되어 새로운 조직으로 바뀌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카버는 그 뜨거운 변화의 매 변곡점들에서 침묵하기도 하고,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술의 힘으로 견디기도 하고, 그러다 결국에는 술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하기도 하면서 근근이 살아남아 그 시간들을 관통했고, 그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남은 삶을 풍요롭게 할 육즙을 만들어냈다. - <레이먼드 카버>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4158 - P29
오늘 아침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책임감, 출판사에 대한 의무, 그리고 내 집 아래를 흐르는 강물로 이끌리는 내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겨울을 맞아 올라오고 있는 무지개 송어, 이게 문제다. 이제 곧 동이 틀 것이고, 때는 밀물이다. 이 사소한 딜레마가 발생하고, 머릿속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고기는 강을 향해 올라오고 있다. 이봐, 나는 살 거야, 그리고 행복할 거야. 어떤 결정을 내리든 간에. — 「논쟁」, 『울트라마린』, 111쪽 - <레이먼드 카버>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4158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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