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 짓는 사람》의 작가 누쿠이 도쿠로는 ‘독서와 책벌레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인식’을 꿰뚫었던 것 같다. 납득하기 힘든 살인동기로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드는 데에는 ‘책벌레 살인자’가 적격이었을 것이다. 모두가 완벽한 긍정적 행위라고 생각하는 ‘독서’에 미친 책벌레가 살인을 저질렀다니! 누가 이런 이야기에 솔깃하지 않을까?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88

에두아르는 착한 사람이다. 내 남편이라 하는 소리가 아니다. 에두아르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가 얼마나 선하고 좋은 사람인지 안다. 나는 그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인식되었으면 좋겠다. 아니, 적어도 ‘밉상 또라이’로 인식되지 않았으면 한다. 에두아르에게는 처세술이라는 것이 심각하게 부족하다. 처세술의 기본인 융통성은 1도 없다. 이런 그를 도와줄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다가, 에두아르에게 먹힐 만한 기막힌 묘안을 생각해 냈다. 책 속 문장을 인용해서 본인의 화법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98

내가 만약 촛불을 밝히지 않는다면,
당신이 만약 촛불을 켜지 않는다면,
우리가 만약 촛불을 밝히지 않는다면,
이 어두움을 어떻게 밝힐 수 있는가?7

나짐 히크메트의 <내가 만약 촛불을 밝히지 않는다면>이라는 시다.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99

에두아르가 드디어 집들이 겸 생일파티에서 발표할 연설문 작성을 마쳤다. 인용할 글은 파스칼의 《귀족의 신분에 관한 세 담론》 중 첫 번째 담론의 일부라고 한다. 인용문의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백인의 짐(The White Man’s Burden)’, ‘노블레스 오블리주’ 따위의 단어가 자동적으로 연상된다. (‘백인의 짐’은 영국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이 19세기 말에 발표한 시의 제목이다. 키플링은 미개한 인종을 올바르게 이끄는 것이 ‘백인의 의무’라고 했다.) 내가 속으로 아니꼽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에두아르는 발췌한 글의 일부를 읽는다.

당신은 당신 조상의 재산을 물려받고 자랑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조상이 그 재산을 모으고 보존한 것이 대단한 우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재산을 축적하기도 하고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당신의 조상이 축적한 재산이 당신에게 전달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합당한 이유에 기반한 법률가들의 판단일 뿐 무엇도 당신이 가질 수 있는 당연한 권리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조상들이 그들이 살아 있을 때 소유했던 재산을 죽은 후 국가에 환원하기를 원한다 해도 당신은 불만을 표할 어떤 권리도 없습니다. 따라서 당신이 소유하는, 조상에게 물려받은 재산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것입니다. 법을 만든 사람들이 당신을 가난하게 만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유산을 받을 수 있게 유리한 법이 적용된 것 또한 그저 우연일 뿐입니다.8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104

책 읽는 것 외엔 할 줄 아는 게 딱히 없는 에두아르에게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주가 몇 가지 있긴 하다. 온갖 물건을 잃어버리고, 심지어 물건을 사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돈을 잃어버리는 재주. 심혈을 기울여 못을 삐뚤게 박고, 그 와중에 벽까지 손상시키는 재주. 하루가 멀다 하고 쌈박질을 벌여 사람들에게 원한을 사고, 온 집안을 엉망진창 난장판으로 만드는 등등의 재주다. 아! 또 있다. 하자 있는 물건을 골라 사는 재주다. 그는 매번 과일은 썩어 문드러진 것을 섞어 사 오며, 그릇은 이가 나간 것도 모르고 사 온다. 이 많은 탁월한 재주가 어째 하나같이 이 모양인가? 그런 그라도 가끔 존경스러울 때가 있는데, 저렇게 나쁜 머리로 어떻게 그 어려운 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다. 엄청났을 그의 노력을 짐작하면 가히 존경스럽다.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110

정원 잡초를 뽑을 때면 보통 사람보다 두 배의 힘을 들인다. 잡풀 제거용 부삽을 샀다는 것을 까먹었는지 사용법을 모르는 건지,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땅을 파서 풀을 뽑는다. 엉덩이를 반쯤 내놓고 정원에서 흙을 파고 있는 꼬라지를 보면, 저것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인가? 크로마뇽인가? 네안데르탈인가? 정의 내리기 힘들다. 고고학박물관에 다녀와서 내가 내린 그의 등급은 ‘유인원’이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도 도구를 사용할 줄 알았다. 스키를 타러 갈 때면 그는 ‘알비노’가 되는데, 자외선차단 크림으로 얼굴에 떡칠을 하기 때문이다. 보다 못해 크림은 피부에 덕지덕지 붙이는 게 아니라 펴 바르는 것이라고 하자, 크림 바르는 법을 배운 적이 없어 몰랐다고 한다. 응용력이 부족하면 배운 것 외엔 아는 것이 없다는 심각한 부작용이 동반된다. 에두아르는 정말이지 클래스가 다른 ‘수준급 덜렁이’다.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112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스완네 집 쪽으로》이다. 에두아르는 책을 펼쳐 소리 내어 읽는다.

그러자 기억이 떠올랐다. 이 맛, 그것은 콩브레의 일요일 아침, 레오니 고모 방으로 아침인사를 하러 가면, 고모가 홍차나 보리수차에 적셔 주던 그 작은 마들렌 조각의 맛이었다. (중략)
오랜 시간이 지나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사물이 낡아 사라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에도, 냄새와 맛만은, 마치 영혼처럼 오랫동안 살아 머무른다. 보다 연약하지만 더욱더 생생하게, 형태는 더 흐려졌어도 더 집요하고 성실하게, 기억하고 기다리고 기대하며 한없이 자그마한 물방울 위에서 추억의 거대한 건물을 단단히 떠받친다.
고모가 내게 준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의 맛인 것을 깨닫는 순간, 고모의 방이 있던 도로 옆 회색 고가옥이 마치 연극무대의 장식처럼 떠올라, 이내 부모님을 위해 지어진 뒤뜰 작은 별채로 이어진다. 그리고 회색 고가옥과 함께, 아침부터 저녁까지 날씨와 상관없이 쏘다니던 마을 구석구석, 점심 전 심부름을 가곤 했던 광장, 좋은 날씨에만 거닐던 길들이 다가왔다.14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132

생속이란 아픔에 대한 내성이 부족하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생속의 반대말은 썩은 속이었다. 속이 썩어야 세상에 관대해질 수 있었다. 산다는 건 결국 속이 썩는 것이고 얼마간 세상을 살고 난 후엔 절로 속이 썩어 내성이 생기면서 의젓해지는 법이라고 배추적을 먹는 사람들은 의심 없이 믿었던 것 같다.
그렇게 속이 썩은 사람들끼리 둘러앉아 먹는 것이 배추적이었다. 날 것일 땐 달았던 배추도 밀가루를 묻혀 구워놓으면 밍밍하고 싱거워졌다. 생속을 가진 사람은 배추적의 맛을 몰랐다.16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134

활기 없던 하루와 우울한 내일에 대한 전망에 휩싸여, 홍차 속에 적셔 둔 마들렌을 한 스푼 무의식적으로 입술에 가져갔다. 부드러운 마들렌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내 속에서 뭔가 굉장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감미로운 기쁨이 내게 들어와 나를 고립시켰다. 그 기쁨은 마치 사랑과 같은 방식으로 나를 채웠다. 고단한 삶의 변화에 무심하게, 삶의 재난을 무해한 것으로, 그 짧음을 착각으로 여기게 했다.17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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