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정면을 바라보는 것인지45도 오른쪽을 바라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답했다. 그럴 때의 아버지는 평소처럼 무표정하기는 했지만 어쩐지 약간 신이 난 듯도 보였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신이 나서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마흔 넘어서야 이해했다. 고통도 슬픔도 지나간 것, 다시 올 수 없는 것, 전기고문의 고통을 견딘 그날은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찬란한 젊음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20

1982년5월15일, 타지에서 학교에 다니던 나는 주말이라 집에 들렀다. 저녁을 먹을 즈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방영되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금세 밥을 먹었고, 위가 안 좋았던 어머니는 한숟갈 먹을 때마다 백번을 헤아리며 씹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흑백화면 속의 젊고 아리따운 여인들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어 흐린 형광등 아래 신문을 읽느라 여념이 없었다. 백번을 세며 밥을 먹던 어머니는 화면 속 여인들이 부러운 모양이었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22

할머니는 내 첫 기억에서부터 허리가 기역자로 꺾여 있었다. 무거운 것을 들지 못하니 잔꾀를 써서 망태에 새끼줄을 연결하고는 그걸 허리에 질끈 묶은 채 질질 끌며 우리 집으로 왔다. 이가 하나도 없어 합죽이였던 할머니는 허리끈을 풀지도 못한 채 마루에 털썩 주저앉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고 합죽합죽 웃었다. 할머니의 망태에는 수수나 조가, 고구마나 감자가, 때로는 다슬기나 올벼가 담겨 있었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27

밀란 쿤데라는 불멸을 꿈꾸는 것이 예술의 숙명이라고 했지만 내 아버지에게는 소멸을 담담하게 긍정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고, 개인의 불멸이 아닌 역사의 진보가 소멸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무기였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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