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카트 지구 뒷골목에 작은 서점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번 보아 익히 알고 있었지만, 6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에 조깅을 하면서 그 앞을 지나려다가 진열창에 로베르트 무질이 쓴 『특성 없는 남자』의 영어판이 전시돼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멈춰 서서 웃는 수밖에 없었다. 습도가 높은 겨울이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기 때문에 서점 안으로 들어가서 그 책을 사지는 않았다. 그러나 진열창 너머로 흘끗 본 계산대에 붙은 〈점원 모집〉이라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알라딘 eBook <내가 행복한 이유>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중에서 - P137
일은 힘들지 않았고, 달리 할 일이 없을 때는 뒷방에서 책을 읽어도 서점 주인은 개의치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천국에 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만 권의 장서를 액세스 요금도 내지 않고 마음대로 읽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따금 내가 다시 분해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곤 했다. 나는 탐욕스럽게 책을 읽었고, 어떤 레벨에서는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가 있었다. 능숙한 작가와 서투른 작가, 정직한 저자와 사기꾼, 진부한 글과 영감에 가득 찬 글을 구별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의뇌는 여전히 내가 모든 것을 즐기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를 원했다. 내가 먼지가 쌓인 책장 너머까지 확산해서, 그 누구도 아닌 존재, 바벨의 도서관의 유령이 돼버릴 때까지.
-알라딘 eBook <내가 행복한 이유>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중에서 - P139
그녀가 서점 안으로 걸어 들어온 것은 봄이 시작되던 날, 가게 문을 연 지 2분 뒤의 일이었다. 그녀가 책을 훑어보는 광경을 바라보며 나는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일의 결과를 뚜렷하게 상상해 보려고 노력했다. 몇 주 동안 나는 매일 5시간씩 계산대를 지키면서 많은 사람과 접촉했고, 그 결과 무엇인가를… 기대하게 되었다. 서로를 첫눈에 보고 반해서 열렬한 사랑에 빠진다든가 하는 일이 아니라, 희미하게나마 상대방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든지, 나도 다른 사람들보다 어떤 특정한 사람을 정말 더 원할 수 있다는 어렴풋한 징후를 찾고 있던 것이다.
-알라딘 eBook <내가 행복한 이유>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중에서 - P139
내 머릿속은 줄리아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가 매분 매초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나는 그녀가 행복해지고, 안전해지기를 원했다.왜? 내가 그녀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왜 누군가를 선택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된 것일까? 궁극적으로는 샘플 제공자들 대다수가 모든 사람이 아닌 어떤 특정한 인물을 원했으며, 사랑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왜? 결국은 진화의 문제로 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과 닥치는 대로 성교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 모두를 돕고 보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편 이 두 가지의 적절한 조합이 자기 유전자를 물려주는 데 유리하다는 점은 명백하다. 따라서 내가 느끼는 감정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이유에 기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무엇을 원하겠는가?
-알라딘 eBook <내가 행복한 이유>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중에서 - P144
인간은 모두 나와 같은 유산으로부터 스스로의 인생을 만들어 가기 마련이다. 반쯤 보편적인 동시에 반쯤 특수하며, 가차 없는 자연도태에 의해 반쯤 예리해지고, 우연이라는 자유에 의해 반쯤 누그러진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다. 내 경우는 그런 과정의 세부를 조금 더 적나라하게 의식해야 한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알라딘 eBook <내가 행복한 이유>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중에서 - P151
무의미한 행복감과 무의미한 절망감이 복잡하게 뒤얽힌 경계 선상을 걸어가면서. 혹시 나는 행운아일지도 모른다. 경계선 양쪽에 펼쳐진 것들을 뚜렷하게 보는 일이야말로 그 좁다란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일 수도 있으므로.
-알라딘 eBook <내가 행복한 이유>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중에서 - P151
S가 제공하는 꿈은 사용자들이 글자 그대로겪었을 수도 있는 인생들의 꿈이며, 세부에 이르기까지 각성 시의 삶 못지않게 현실적이며 사실적이다.
-알라딘 eBook <내가 행복한 이유>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중에서 - P161
만약 꿈속의 인생이 유쾌하지 않게 변한다면, 당사자는 자기 마음대로 그 꿈을 중단하고 다른 인생의 꿈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다.(이럴 경우 S를 또 섭취하는 꿈을 꿀필요는 전혀 없지만… 이따금 그러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S 중독자는 제2의 인생을 조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인생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 따위는 없고, 변경 불가능한 결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실패도, 막다른 길도 없는 인생인 것이다. 모든 가능성들은 영원히 열려 있으므로.
-알라딘 eBook <내가 행복한 이유>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중에서 - P161
세계 간 전이 능력을 갓 발달시킨 분신들은 여러 세계에 걸쳐 워낙 희박하게 분포돼 있는 탓에 초기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시간이 더 흐르면 일종의 대칭적인 정체 상태가 자리 잡는 것처럼 보인다. 잠재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모든 〈흐름〉들은, 그 〈역류〉에 해당하는 것들을 포함해서 동일한 확률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이 서로를 상쇄하는 식이다.
-알라딘 eBook <내가 행복한 이유>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중에서 - P163
이윽고 사태는 일종의 역치를 넘게 된다. 복잡하고 지속적인 〈흐름〉들이 발달하는 것이다. 얽히고설킨 이 거대한 〈흐름〉들은 무한 차원의 공간만이 포괄할 수 있는 병적일 정도로 복잡 기괴한 위상기하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런 〈흐름〉은 점성粘性을 가지고 있으며, 인근의 점들을 그대로 끌어들인다. 그 결과 〈소용돌이〉가 태어난다. 돌연변이를 일으킨 〈꿈꾸는 자〉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세계에서 세계로 떠내려가는 속도도 빨라진다.
-알라딘 eBook <내가 행복한 이유>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중에서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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