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도라는 기다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기다림은 항상 시간 낭비의 극치이고 완전히 무의미하며 자존심 구기는 짓이다. 기다리게 하는 사람은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존재이므로. 근데 그녀는 지금 캠핑 의자에 앉아 세상과 하나 된 느낌이 드는 게, 마치 새로운 운명을 발견한 것만 같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존재여도 좋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도 좋다. 그리고 쉴 새 없이 부지런히 일하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그저 지켜보는 것도 좋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24

좋은 냄새가 난다. 연기와 자유 냄새 같다. 도라는 불가에 마지막으로 앉아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러나 불꽃을 바라보는 동안 사람들 모두 질문 하나 하지 않는다는 건 기억하고 있다. 바다에서 파도를 바라볼 때와 똑같이 말이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25

식사를 마치고 프란치가 다시 조각 작업을 이어가는 동안, 도라와 고테는 불가에 그대로 앉아 있다. 그녀는 옆에 앉아 있는 고테의 존재를, 그리고 프란치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차분하게 느낀다. 한데 벼랑 끝에 섰을 때의 현기증 같은 느낌이 아니라 결정체처럼 투명하게 보이는 얼어붙은 풍경처럼 느껴진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26

그가 나쁜 사람으로 비쳐지는 게 싫어서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지, 혹은 정말로 부당한 판결을 받았다고 믿고 있는 건 아닌지 도라는 깊이 생각해본다. 가치관을 깨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얼마나 많은 다양한 현실이 공존할 수 있을까?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31

다행히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이 그녀가 소지품을 주워 담는 걸 참을성 있게 기다려준다. 자기 자신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을 너그럽게 봐주는 전형적인 브란덴부르크 지역의 스토아주의적 태도로 말이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40

문득 도라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 존재하는 게 뭔지 깨닫는다. 거기에 존재하는 사랑은 한없이 깊고 무한해서 이성적인 이해력을 뛰어넘는다. 그 사랑의 이면에는 서로를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다. 이 불안감 역시 무한하고 한없이 깊어서 인간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41

그러나 진화를 통해 의식과 시간감각을 가지고 만물의 무상함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생명체는 이러한 무한한 감정이 없다. 역겹다. 인간이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해가는 게 놀라운 일도 아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42

모든 것이 이미 존재하며 세상에 새겨져 있고 준비하면서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다. 이 모든 건 저절로 이루어진다. 인간이 돌릴 바퀴도, 잡아당길 레버도 없다.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다. 이 같은 생각에 도라는 긴장이 살짝 풀리는 걸 느낀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59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고, 또 누가 무엇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치를 반대하든 지지하든, 그것 역시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마법 같은 단어다. 그럼에도 계속 나아가고, 그럼에도 살아 있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저기 옆집에 한 인간이 쓰러져 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73

"내 생각엔 자연 속 그 어떤 것도 사라지지 않아. 우리 모두 여기 그대로 남아 있을 거야. 우린 그저 모습을 바꿀 뿐이지."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89

고테의 정원 위에 눈부시게 밝은 빛이 머물고 있다. 나무 꼭대기를 비추고 밤의 어둠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빛이. 마법에 이끌리듯 담장으로 가서 의자 위에 올라간다. 트레일러 발판 위에 커다란 전조등 하나가 놓여 있다. 작업 공간 전체를 환하게 비출 만큼 밝다. 고테는 암컷 늑대의 등 아랫부분, 뒷다리, 꼬리를 조각하느라 여념이 없다. 팔의 움직임에 따라 그의 상반신이 흔들린다. 늑대를 조각하는 데 완전 빠져 시공간을 초월한 상태다. 늑대가 귀를 쫑긋 세우고 웃으려고 주둥이를 벌린 채 상냥하면서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듯한 표정으로 도라를 쳐다보고 있다. 고테가 발을 자유롭게 풀어주면 당장이라도 덤벼들 기세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407

귀를 쫑긋 세우고 즐거운 얼굴 표정의 암컷 늑대는 수컷에 비해 몸집은 좀 작지만 날씬하고 아름답다. 그제야 도라는 조각상 받침대의 불룩한 부분이 뭔지 알아차린다. 새끼 늑대 한 마리가 암컷 늑대 발치에 웅크리고 있다는 걸. 토실토실하고 귀여운 새끼 늑대는 사랑에 빠진 눈빛으로 엄마 늑대를 쳐다보고 있다. 거기 그렇게 엄마 늑대, 아빠 늑대, 새끼 늑대가 함께 모여 있다. 그 셋에게 부족한 건 아무것도 없다. 앞으로도 없을 거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419

어머니의 시신을 운구할 때 아무도 울지 않았다. 가족 모두 각자 자기 방에 앉아 침묵을 지켰다. 끔찍한 정적이 집 안에 감돌았다. 마치 어머니가 사랑, 안정감, 가족을 비롯하여 모든 걸 가져간 거처럼 말이다. 지난날의 잔상들과 밤 이외에 남은 거라곤 없었다. 정원의 새들조차 침묵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423

도라와 로베르트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말도 잘 통하고 아름다운 공동주택도 있었다. 그런데도 뭔가 부족했다. 그들은 알맹이가 빠진 커다란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고, 결국 그 껍데기마저 사라져버렸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439

결혼 상대로 형편없는데도 불구하고 고테는 그냥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어느 순간 도라는 그와 원래 있던 자리에 남는 게 의미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공유가 가능하다. 고테의 존재가 도라에게 전달됐고, 그는 자신의 존재를 그녀와 공유했다. 결국 두 사람은 그들 사이를 가르는 담장으로 연결되어 공존했던 거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440

비가 차츰 잦아든다. 축축이 젖은 얇은 막처럼 안개 같은 게 얼굴과 손에 끼어 있다. 거리에 넘쳐흐르던 빗물도 말라간다. 나무에선 물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맨 먼저 둥지 밖으로 나온 새들이 다시 노래를 부른다. 어디선가 황새 울음소리도 들려온다. 탁탁 타르르 탁탁. 톰과 슈테펜 집 앞 커다란 물웅덩이 가장자리에 포르투갈 사람 둘이 서서 잡담을 하며 담배를 피우다 도라가 지나가자 손을 들어 인사를 한다. 고테의 집은 말이 없다.
앞으로 누군가 이 집에 이상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 금요일마다 창문을 들여다봐야겠군. 환기도 시키고 난방도 켜고 수도꼭지도 열었다 잠그고. 인터넷으로 찾아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잔손도 많이 들어갈지 모른다. 도라는 집 열쇠를 갖고 있다. 문득 도라가 시선을 옮겨 담장 위를 보니 주황색 고양이가 웅크리고 앉아 쳐다보고 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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