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에서 위안을 얻고 마음의 평화를 찾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관계가 생계와 연결될 때는 더더욱 안정적으로 느껴지겠지. 그러나 연구소 로비에 잠시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다시 일하러 올라가기 전에 나는 어쩐지 무섭고 슬프다는 생각을 했다. 살아 있는 한 언제까지나 지고 가야 할 먹고사는 걱정, 밥줄에 대한 집착이 무섭고, 그 집착이 앞으로 198주년, 298주년, 398주년…이 지나도록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이, 그리하여 나는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이 연구소라는 곳에 발목 잡힌 채 끝없이 허덕여야 하리라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도 슬프고 무서웠다.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영생불사를 하건 안 하건, 자기 생계를 자기 손으로 벌어야 하는 사람은 누구나 나와 같은 처지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딱히 위안이 되는 건 아니지만.

-알라딘 eBook <그녀를 만나다> (정보라 지음) 중에서 - P36

세상엔 정말로 이상한 사람들이 많다. 물론 그 사람들은 자기들 관점에서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 관점을 고려해서 합산하면 세상의 이상한 사람 숫자는 대략 그만큼 더 불어나게 된다. 그러니까 결론은 똑같다. 세상에는 정말로 이상한 사람들이 많다.

-알라딘 eBook <그녀를 만나다> (정보라 지음) 중에서 - P38

그래서 나는 기계는 믿지 않았다. 내 몸을 돌보는 일은 내 손으로 해야만 했다. 내가 기억하는 기계는 사람을 죽였다.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서 멀쩡한 청년이 죽었고 크레인이 무너져서 밑에 있던 사람을 깔아 죽였고 혼자 운행하던 지하철이 광고판 고치던 사람을 치어 죽였고 배가 가라앉고 독극물을 뿜어내고 치고 떨어뜨리고 밀어내면서 장비는, 기계는, 기계로 가득한 생산설비는, 공장은, 작업장은, 일터는 사람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알라딘 eBook <그녀를 만나다> (정보라 지음) 중에서 - P44

절대 잊지 않는 건 그 순간순간의 감정이었다. 기억도 논리도 이성도 인간의 모든 지적 활동이 다 사라져도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감정이다.

-알라딘 eBook <그녀를 만나다> (정보라 지음) 중에서 - P48

"바흐친은 인간이 주관적인 시선으로 객관적인 외부 세계를 단순히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간을 대할 때 자신이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는 모습, 즉 거울상의 모습과 타인이 나를 볼 때 나타날 것이라 생각하는 모습, 그리고 내가 바라보는 타인의 모습, 이렇게 세 가지 시선으로 관계를 맺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알라딘 eBook <그녀를 만나다> (정보라 지음) 중에서 - P58

"그리고 인간은 타인이 자신을 볼 때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습, 자신이 되돌아보는 자신의 모습에 맞추어 자신을 계속해서 변화시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타인을 바라볼 때 그 시선 안에는 인간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타인이 나를 볼 것이라고 상정하는 시선들이 함께 들어 있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타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알라딘 eBook <그녀를 만나다> (정보라 지음) 중에서 - P58

"이런 관계 이론에 딥페이크 기술을 적용하여 저희는 작가님의 얼굴에서 여러분이 보고 싶은 모습, 본인이 작가님에 대해 상상한 모습, 본인이 투영한 모습만을 볼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여러분 앞에 놓인 화면은 여러분의 시선과 뇌파를 추적하여 여러분이 작가님에게서 어떤 모습을 추정하는지를 예측한 뒤에 거기에 맞춰 딥페이크로 여러분의 추정에 맞는 모습을 내놓게 됩니다."

-알라딘 eBook <그녀를 만나다> (정보라 지음) 중에서 - P59

혐오는 너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눈앞의 화면은 그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자신이 상상하는 모습이,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추상화한 개념의 모습이 그 화면에 나타나는 것이다. 화면을 본다는 것은 자신도 지금껏 알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나는 나도 몰랐던 내 마음속에 있는 모습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알라딘 eBook <그녀를 만나다> (정보라 지음) 중에서 - P60

그때는 음악 선생님도 죽지 않았고 활동가도 죽지 않았고 전차조종수도 죽지 않았다. 모두가 살아 있었고 모두가 춤추던 날이었다. 모두가 행진하고 고함치고 평등을 외쳤고 그래도 차별금지법은 제정되지 않았고 그래서 그 뒤로 2년이 더 지난 어느 잔인한 봄날에 차별이 사람을 죽였다. 차별은 언제나 사람을 죽였다. 여러 명을 연달아 죽였다.

-알라딘 eBook <그녀를 만나다> (정보라 지음) 중에서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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