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절망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복수가 아니었다. 최소한 이런 복수는 원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마을 전체가 ‘그것’의 존재에 기대어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이었다.
합당한 결말이라 해도, 그는 밀려오는 상실감을 어찌할 수 없었다. 알지도 못하는 타인들의 주술과 환상과 잘못된 믿음에 빼앗겨 버린 어린 시절, 매일이 생사의 기로였으나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어져 버린 그때의 오랜 고통과 절망을 애도하며 그는 폐허가 된 마을에 멈추어 서서 울었다.
그리고 마침내 눈물이 멈추었을 때, 세상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그는 해가 뜨는 쪽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 <저주토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6406814 - P172
자신이 ‘요령’이 없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런 ‘요령’을 남들은 대체 어디서 배워오는 것인지, 그녀는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었다. 돈을 최대한 빨리 많이 벌어서 더 넓은 집과 더 비싼 차를 사고 자식을 수업료 비싼 영어 유치원과 경쟁률 높은 사립 학교에 집어넣고 계절마다 온 가족이 해외여행을 가는 것은 남 보기에 ‘번듯한’ 삶일 수는 있어도 그녀가 원하는 인생은 아니었다. 그녀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원했고 이웃과 사이좋게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소박하지만 따뜻한 동네 공동체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런 동네를 찾아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 <저주토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6406814 - P176
남편은 ‘자본주의에 매몰되지 않는’,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했다. 그녀 또한 대학 시절에 학점과 스펙에 매달리고 대기업이나 공무원 취업으로 대표되는 안정적인 직장을 최고로 치는 주위 사람들의 천편일률적인 압박을 지겹게 여기고 경멸했기 때문에 남편이 원하는 삶의 지향점이 자신과도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졸업과 동시에 결혼했고, 졸업과 동시에 그녀는 취업했다. 아주 상세하고 구체적인 계획이 없는 한 ‘대안적 삶’이라는 말만으로는 대안이 될 수 없고 ‘자본주의에 매몰되지 않는’ 직장이란 대체로 직원에게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곳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얼마 못 가서 깨달았다. 그녀가 대안 없는 생계를 걱정하며 직원들의 정상적인 근무가 아니라 일방적 희생으로 운영되는 대안적 직장에서 하루하루 시달리며 부스러져 가는 동안 남편은 그녀의 대학 선배였지만 그녀보다 늦게 학교를 졸업하고 딱히 내놓을 만한 직업 없이 ‘대안적인 삶’을 찾아 떠돌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그녀 모르게 빌려 쓴 이천만 원이었다. - <저주토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6406814 - P188
아이는 생존을 위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자기 나름대로 파악한다. 어린아이의 지각에는 한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에 대한 세상의 호의와 인간의 신뢰 여부를 아이는 어른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이해한다. 왕자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친절하고 예의 바르지만 진심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성장했다. 왕자가 아는 한, 그것은 세상과 인간의 기본적인 특성이었다.
- <저주토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6406814 - P203
황금 배의 남자가 제안했다.
"공주에게 인간의 삶은 줄 수 없지만, 대신 인간이 알지 못하는 평온과 무한을 약속하겠다."
공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텅 빈 왼팔 소매가 움직였다. 공주는 산들바람과도 같이 시원하고 부드러운 공기가 오른쪽 뺨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 <저주토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6406814 - P220
밝은 미래 따위는 믿지 않았다. 먹고 살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언제나 지금보다는 조금 전이 가장 좋은 순간이었고, 앞날보다는 지금이 가장 좋은 순간이었다. 돌아가면 아마도 여기서 이렇게 태평하게 앉아 느릿하게 저물어가는 햇살을 즐기며 시간을 낭비하던 때가 그리워질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순간을 최대한 즐기기 위해 애썼다. - <저주토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6406814 - P229
폴란드어 교과서의 원래 제목은 Kiedyś wrócisz tu (너는 언젠가 이곳에 돌아올 것이다)였다. 나는 언젠가 돌아올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내가 이곳을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삶에 기회는 흔하게 주어지지 않으며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뜬 채로 언제까지나 지낼 수는 없었다. - <저주토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6406814 - P230
...소원을 빌 수 있다면
나는 어색해질 거야
무엇을 빌어야 할까
나쁜 시간을 아니면 좋은 시간을.. - <저주토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6406814 - P230
... 소원을 빌 수 있다면
나는 아주 조금만 행복해지고 싶어
너무 많이 행복해지면
슬픔이 그리워질 테니까
- <저주토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6406814 - P235
삶
나는 삶을 사랑해
…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많은 것을 기대하지
- <저주토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6406814 - P235
좋은 시간은 이제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으나 나쁜 시간을 소원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래는 없었다. 그와 내가 알았던 모든 삶의 유형들은 전부 과거에 갇혀 있었다. - <저주토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6406814 - P242
아무도 묻지 않았지, 우리가 아직 무명이었을 때
우리가 살고 싶은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
이제 나는 큰 도시를 홀로 헤매다니고
문과 창문으로 집의 거실을 엿보며
무언가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어….
이제 내가 기다릴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계속 욕실에 서 있었다. 누군가 기적처럼 찾아와서 이 삶에 묶인 나를 풀어주기를 기다리며. - <저주토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6406814 - P243
원래 세상은 쓸쓸한 곳이고 모든 존재는 혼자이며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 혹은 복수는 경우에 따라 반드시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필요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로우며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쓸쓸하고 외로운 방식을 통해서, 낯설고 사나운 세상에서 혼자 제각각 고군분투하는 쓸쓸하고 외로운 독자에게 위안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조그만 희망이다. - <저주토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6406814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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