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에 햇살이 비친다. 썩 좋은 타이밍은 아니지만 금빛 햇살이 데이비드에게 드리운다. 오후 5시 21분, 서쪽에서 3번가의 고층 빌딩 사이로 비치는 이 엄청난 햇살은 생명의 빛, 일시적인 기적이다. 그 기적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정확히 십이 분 동안 지속된다. 그러니 5시 33분이면 끝나리라.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53
순탄한 비행은 모두 비슷하다. 반면 난비행은 각기 나름대로 힘들다. 파리-뉴욕 간 AF006 여객기가 노바스코샤주 남부 상공을 지나던 오후 4시 13분, 푹신한 거대 적란운 벽이 전방에 나타난다. 구름 낀 전선이 아주 빠르게 일어난다. 비행이 아직 십오 분 남았지만 북쪽과 남쪽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아치형으로 펼쳐진 전선은 이미 최고치인 4만 5000피트 상공까지 올라와 있다. 3만 9000피트 고도에서 비행 중인 보잉 787 여객기는 뉴욕을 향해 하강을 시작해야 했으므로 구름 전선을 피할 도리가 없다. 조종실이 돌연 부산스러워진다. 부조종사가 지도와 기상 레이더를 분석한다. 구름을 동반한 거대한 한랭 전선은 예보에 없었다. 지드 파브로는 이제 놀란 것을 넘어 진지하게 걱정이 된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56
어쩌면 조종사들은 죽기 전 인생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순간조차 갖지 못할지도 모른다. 마클은 승객들 생각도 하지 않는다. 단지 이 크고 무겁고 둔중한 보잉 여객기를 구하려고 애쓸 뿐. 그는 암기하고 있는 동작들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 반사 신경과 이십 년의 경험치에 자신을 맡긴다. 그래도 엉망진창이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61
베티의 피부는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을 때의 정원 흙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다. 죽음 속에 굳어진 베티는 개구리의 엑토플라즘6)이 되었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66
문학적 소양이 생뚱맞게 여겨지는 경영인들의 세상에서, 그는 그 소양을 상징적 지배의 강력한 도구로 삼았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86
어둠의 텍스트, 거리를 둘 줄 모르고 야유조차 고통스러운 텍스트. "맙소사, 종교적 정신에서는 얼마나 많은 어리석음이 배어 나오는지. 모든 신념은 지성에 비수를 꽂는다. 신자는 죽음을 또 하나의 불운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려다 이성을 잃었다. 나는 의심으로 인해 생의 독학자가 되었고, 그리하여 매 순간을 한층 더 즐거이 누릴 수 있었다. 신의 영광을 드러내며 반짝이는 구름 앞에서도 나는 신비감에 빠지지 않았다.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순간 헤엄을 치려고 용을 쓰겠지만, 아르키메데스에게 기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나는 물속에 가라앉으면서 어떤 명제도 진리로 통하지 않는 심연을 향해 눈을 뜬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97
그녀는 『아노말리』를 이 작품이 예고한 참사에 비추어 다시 읽어 본다. 그리고 작가명이 빅토르 미젤(Victør Miesel)로 되어 있음을 알아차린다. 공집합의 기호로 쓰이는 그리스 문자 ø. 비극적인 재치의 발휘.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97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 충분히 깨달을 만큼 오래 산 사람은 없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98
위상학을 연구하는 그 영국 여자가 프린스턴에 온 지도 두 달. 너무 가는 다리와 너무 얌전한 갈색 머리, 너무 긴 코와 너무 까만 눈을 한, 언제나 냉담한 그녀는 이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에이드리언을 사로잡고 있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19
그는 스무 살에 마르코프 사슬, 켄달 표기법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간략히 말하자면 그는 대기 행렬에 관심이 많다. 특히 리틀의 법칙, 즉 안정적인 시스템 내의 평균 객체 수는 시스템에 유입되는 객체의 양과 객체가 시스템 안에 머무는 시간을 곱한 값과 같다는 법칙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자.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30
에이드리언 밀러는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광팬이고, 그 책에 나오는 역사상 두 번째로 강력한 컴퓨터 ‘깊은 생각(Deep Thought)’이 ‘생,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거대한 물음’에 대해 750만 년의 계산 끝에 ‘42’라는 단순한 답을 내놓았기 때문에 해당 프로토콜 번호는 42가 된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33
그렇다, 뤼시가 그를 흔들어 놓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가 스무 살만 젊었어도 그녀에게 아이를 만들자고 했을 텐데. 나이 차 때문에 다 어림없는 일이 되었다. 앙드레의 딸 잔이 조금 있으면 뤼시 나이가 될 판인데 무슨. 얼마 전 농담 삼아 어떤 여자에게 "내 과부가 되어 주겠소?"라고 청한 적이 있었다. 과부로 추정되는 그녀는 웃지 않았다. 요즘 그가 만나는 여자들은 왜 하나같이 어린가? 친구들은 그와 함께 늙어 갈 수 있지만, 그가 사랑하는 여자들은 그럴 수 없다. 그는 도망친다, 겁이 난다. 다가오는 죽음과 저녁 식사는 같이할 수 있지만 잠자리는 불가능하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47
죽음이 가시권에 들어왔을 때부터, 요컨대 오래전부터 그는 욕망을 그가 생각하는 사랑의 중심에 두었다. 그런데 뤼시는 누가 봐도 욕망을 주변에 두는 여자였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48
그가 서른 살이라면, 피부가 탄탄하다면(죽음도 주름도 겁내지 않는 불멸의 피부 말이다), 그의 머리가 새까맣고 숱이 많다면, 그렇게 잘난 남자가 옆에 누워 있었어도 뤼시가 아침마다 쌩하니 욕실로 달려갔을까? 가령 저 잘생긴 닐센이라면. 그래, 닐센, 안 될 것 없지. 그는 사랑스러운 뤼시의 몸에 올라탄 눈부신 닐센의 몸뚱이를 얼핏 떠올리고는 부르르 떤다. 그는 이미 답을 알고, 그 답이 그를 고통스럽게 한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49
그래도 때때로 뤼시는 그에게 손을 뻗어 그 육(肉)의 실린더가 단단한지 확인하고는 그 위에 올라탔다. 그는 그녀 안에 깊이 처박히고, 그 체위로는 키스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즉시 허리를 세우고 신속하게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 날씬한 몸이 땀에 젖었다면 이제 그도 빨리 절정을 맛봐야 한다는 신호다. 앙드레는 해방의 오르가슴에 도달하기 위해 그녀를 거칠게 취하려 든다. 하지만 섹스의 빈도도 그렇고, 속전속결의 리듬도 그렇고, 그와는 무엇 하나 맞지 않았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49
그는 갈망했고, 슬펐고, 불안했다. 그래서 차츰 조심성을 잃고 자꾸 눈치 없이 집요하게 굴었다. 하지만 눈치 있는 집요함도 있나? 존재를 부정당하고 육체적으로 좌절한 그는 어디서 새로운 무게 중심을 찾아야 할지 알지 못했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50
뤼시는 완전히 떠났다. 건축가는 ‘다른 데로 옮겨 갔다.’는 표현을 거듭 되뇐다. Sic transit(지나갈 것이다). 앙드레는 이미 알고 있다. 모든 점을 고려할 때, 바로 옆에 누워 있지만 몇 광년 너머에 있는 여자를 미적지근한 무관심의 그늘 속에서 끝없이 욕망하기보다는 아예 떠나 버린 여자를 매일 그리워하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5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