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흰 종이에 네 글자를 적었다.
宇宙洪荒.
"이 문장 기억나지?"
물론이었다. 『천자문』의 시작인 ‘천지현황’의 다음 사자성어 ‘우주홍황’이다.
"우주는 넓고 거칠다. 그런데 『천자문』의 우주는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지금 말하는 그 우주가 아니란다. 집 우(宇)는 집의 대들보에서 비롯된 글자로 공간을 뜻하고, 집 주(宙)는 밭(田)에 싹이 움트는 모양에서 온 것으로 즉, 시간의 변화를 의미하지. 그러니까 이 문장은 공간과 시간이 넘치도록 크고 황량하다는 뜻으로 읽어야 돼. 그런데 이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의 특성이기도 하지. 우주의 대부분은 그냥 텅 비어 있단다."

-알라딘 eBook <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중에서 - P14

"고양이는 인간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에 맞춰 행동을 하지만 철저히 자기중심적이야. 타고난 나르시시스트거든. 주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거나 절대적으로 복종한다거나 하지 않아. 그런데도 이놈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들의 사랑을 받고 있어. 이기적인 인간은 다들 싫어하면서 왜 자기밖에 모르는 고양이한테는 사족을 못 쓰는 걸까?"

-알라딘 eBook <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중에서 - P20

수백만 년 전, 하루종일 초원을 달리며 살도록 진화한 인간의 몸은 여전히 끝없는 활동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살이 찌고, 피가 달고 걸쭉해지면서 혈관이 막혀버린다고 했다.

-알라딘 eBook <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중에서 - P22

"우주는 생명을 만들고 생명은 의식을 창조하고 의식은 영속하는 거야. 그걸 믿어야 해. 그래야 다음 생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는 거야.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알라딘 eBook <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중에서 - P76

하지만 선이의 세계관에서도 생에 대한 집착은 당연했다. 지금의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개별적인 의식을 갖고 있지만 죽음 이후에는 우주정신으로 다시 통합된다. 개별성은 완전히 사라지고 나와 너의 경계 자체도 무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이에게도 이 생의 의미는 각별했다. 개별적인 의식을 가지고 살아 있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이니 너무나 짧은 이 찰나의 생을 통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존재가 되도록 분투하고, 우주의 원리를 더 깊이 깨우치려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선이에게는 그래서 모든 생명이 소중했다. 누구도 허망하게 죽어서는 안 되며, 동시에 자신의 목숨도 헛되이 스러지지 않도록 지켜내야 했다.

-알라딘 eBook <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중에서 - P82

다시 낯선 환경에 던져지고 보니 그저 익숙한 것이 더 나아 보였을 수도 있다.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꼭 좋았던 무언가를 향한 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저 익숙한 무언가를 되찾고 싶은 마음일 수 있다.

-알라딘 eBook <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중에서 - P85

운명에 대한 믿음 같은 인간적인, 참으로 인간적인 일종의 오류를, 지금의 나는 전혀 믿지 않지만, 선이와 관련된 일에서만큼은 우리의 생애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이 이어져 있을 거라는 쪽으로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알라딘 eBook <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중에서 - P93

그 순간만큼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의식이 사라졌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와 나, 그런 뚜렷한 경계가 사라지고 공통의 슬픔이라는 압도적 촉매를 통해 선이와 내가 하나가 된 것만 같았다.

-알라딘 eBook <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중에서 - P97

"저는 의식을 가진 존재, 특히 고통을 느끼도록 만들어진 존재들,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바다의 물고기든 하늘의 새든, 그리고 저를 포함한 모든 휴머노이드들은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무 고통도 없었을 테니까요."

-알라딘 eBook <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중에서 - P111

"의식이 있는 존재는 돌멩이나 버섯과 달리 자기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요. 다른 존재의 고통에도 공감할 수 있고, 우주의 역사나 기원에 대해 알아갈 수도 있어요. 자기에게 고통을 준 존재들을 용서할 수 있고, 그 고통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곰곰이 되새긴 다음, 그런 일이 자신에게든, 아니면 다른 누구에게든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할 수 있어요."

-알라딘 eBook <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중에서 - P114

어떻게 존재하게 됐는지가 아니라 지금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집중하세요. 인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관념을 만들고 거기 집착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늘 불행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아라는 것을 가지고 있고, 그 자아는 늘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할 뿐 유일한 실재인 현재는 그냥 흘려보내기 때문입니다.

-알라딘 eBook <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중에서 - P120

"뭔가를 믿으려는 마음을 저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바로 그 마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보이지 않는 뭔가를 믿으려는 마음. 이야기는 세상의 모든 것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믿게 만드는 정신적 장치입니다."

-알라딘 eBook <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중에서 - P123

끝이 오면 너도 나도 그게 끝이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을 거야. 선이는 옳았다. 훗날 때가 왔을 때, 선이도 나도 일말의 의심 없이 알 수 있었다. 끝이 우리 앞에 와 있고,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라딘 eBook <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중에서 - P154

"잠깐이지만 우주의 아름다움을 엿보고 갈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이걸 다시 보려면 억겁의 시간을 기다려야 할 거야."

-알라딘 eBook <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중에서 - P214

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묻는다. "현실하고 다른 일을 상상해보신 적이 한 번도 없으세요?"라고. 거기까지 읽었을 때, 선이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알라딘 eBook <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중에서 - P216

나는 그대로 거기 남았다. 그리고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죽거나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남아 지켜보았다. 오래지 않아 내 몸 여기저기에도 서서히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지만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세월이 흘렀고, 문득 생각이 나면 선이의 무덤까지 다녀오곤 했다. 솟대는 쓰러지지 않고 그대로 잘 버티고 있었다. 가끔은 바다에서 날아온 갈매기가 거기 앉아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곤 했다.

-알라딘 eBook <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중에서 - P218

나와 인연을 맺었던 존재들은 빠짐없이 이미 우주의 일부로 돌아갔다. 우주는 생명을 만들고 생명은 의식을 창조하고 의식은 영속한다. 선이가 늘 하던 이 말을 믿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알라딘 eBook <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중에서 - P222

나와 인연을 맺었던 존재들은 빠짐없이 이미 우주의 일부로 돌아갔다. 우주는 생명을 만들고 생명은 의식을 창조하고 의식은 영속한다. 선이가 늘 하던 이 말을 믿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파랗기만 하던 하늘이 서서히 오렌지빛으로 물들고 있다. 노을이 진하니 내일은 맑을 것 같다. 그리고 난 그 내일을 보지 못할 것이다. 석양이 기세를 잃고 이제 검고 어두운 기운이 하늘 한가운데에서부터 점점 넓게 번져가며 거칠고 누른 땅을 덮기 시작한다. 그런데 내가 정말로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보고 있다고 믿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끈질기게 붙어 있던 나의 의식이 드디어 나를 떠나간다.

-알라딘 eBook <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중에서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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