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유물과 함께한 시간보다 유물을 바라보는 사람을 보아온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다른 이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박물관에 매일 출근하기에 누리는 즐거움이다. 뭔가를 가만히 바라보고 온 이를 만나면, 그는 평소의 그가 아닌 것 같다. 내 앞에는 조용히 머물며 맑아진 한 사람이 있다. 두런두런 건네는 몇 마디 짧은 대화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시간을 내어 만난 사람이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그가 바라본 유물이 그를 물들이고 내게 옮겨오는 느낌이 좋다. 사람마다 느끼는 지점이 다르며, 각자에게 닿아 만들어질 이야기는 한 가지 톤이 아니라는 것을 배운다.

-알라딘 eBook <멈춰서서 가만히> (정명희 지음) 중에서 - P6

오래 만나지 못한 이에게, 함께 있으면 편안한 이에게 같이 보고 싶은 전시가 있다며 말을 걸어보자. 박물관 문을 나올 때 그 이전과는 다른 어떤 공기가 당신 안에 남아 있을 것이다.

-알라딘 eBook <멈춰서서 가만히> (정명희 지음) 중에서 - P7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된다知則爲鎭愛愛則爲眞看看則畜之而非徒畜也"는 말이 그의 문장에서 나왔다.

-알라딘 eBook <멈춰서서 가만히> (정명희 지음) 중에서 - P14

그림을 사랑하게 된 이는 마음에 공간이 생긴다. 사랑에 빠졌을 때처럼 내 안에 고정되었던 시선이 바깥을 향해 열린다. 대상을 더 섬세하게 느끼고 알고 싶다는 열망이 커진다. 그림 한 점 앞에 오래 서서 머물기도 하고, 이미 본 그림을 또 보러 가기도 한다. 화가의 시선이 도달한 공간, 붓을 잡은 이의 시간에 스치던 생각과 감정에 닿는다. 어떤 의도나 목적 없이도 무언가로 향하는 마음 그대로를 인정하게 된다. 알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알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알지 못하는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이긴다. 언제나 그랬지만 느낌이 먼저다.

-알라딘 eBook <멈춰서서 가만히> (정명희 지음) 중에서 - P15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을 때는 그저 들어준다. 우리는 항상 곁에 있는 사람에게 쉽게 소홀해지는데, 어느 때는 자신을 외롭게 하는 진짜 주범이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인 것 같다. 시간을 내어주고, 기다려주고,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조금은 나아진다.

-알라딘 eBook <멈춰서서 가만히> (정명희 지음) 중에서 - P20

여전히 어떤 사람을 만나면 그의 책꽂이가 궁금하다. 그가 읽어온 모든 책을 읽으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을까. 한때 밑줄을 그었던 문장이 모여 있는 방에는 제목이 보이지 않는 책이 놓여 있다. 꽂지 못한 책이 가 있는 곳을 서성일 이에게 호기심의 책꽂이가 놓여 있다.

-알라딘 eBook <멈춰서서 가만히> (정명희 지음) 중에서 - P26

기억의 서랍을 열어 자신이 지나온 공간에서 어떤 향이 나는지를 찾아보는 시간. 아이들의 얼굴에 머무는 표정을 바라보고 대답을 기다릴 때 내 마음에도 창틈으로 들어오는 바람 같은 것이 스친다. 지금도 가장 기억나는 답은 빵집을 지나갈 때 갓 구운 빵에서 나는 향, 그리고 엄마가 미역국을 끓일 때 맡았던 향이었다.

-알라딘 eBook <멈춰서서 가만히> (정명희 지음) 중에서 - P28

오늘은 행복에 대해 써야겠다. 내게 있어 행복은 함께 있는 느낌이다. 함께하는 마음은 두려움을 없앤다. 녹차 티백 뒷면에는 차를 우리기에 적정한 온도는 섭씨 70도라고 쓰여 있다. 끓인 물을 컵에 붓고 기다렸다. 섭씨 70도라……. 어느 정도 기다리면 되는 온도일까. 너무 뜨거우면 찻잎이 놀라 떫고 씁쓸해지고, 너무 식으면 차향이 우러나질 않는다. 이런저런 상황을 터득해야 알게 되는 물 온도와 같은 사랑의 온도. 계속 사랑할 수 있는 적절한 온도는 몇 도일까? 차의 색을 보고 향을 맡는다. 오늘은 섭씨 70도를 잘 맞췄다. 차의 색과 온기가 참 좋다.

-알라딘 eBook <멈춰서서 가만히> (정명희 지음) 중에서 - P30

유물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을 기억한다. 과거를 보여주는 유리 구슬처럼 우리는 갈 수 없는 어떤 곳을 보여주다가도 어떤 날은 거울이 되어 우리를 비춘다. 거울 앞에 반사되는 대상뿐 아니라 내 앞에 있었으면 하는 대상과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보여준다. 유물과 거울은 서로 통한다. 유리와 거울에 비친 대상은 우리의 믿음으로 인해 현존하게 된다.

-알라딘 eBook <멈춰서서 가만히> (정명희 지음) 중에서 - P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