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정말 오빠가 사는 데예요?」
내리는 비 속 잔물결처럼 명랑한 그녀의 목소리는 톡 쏘는 토닉 같았다. 뭐라 대답하기 전, 나는 잠시 동안 오르락내리락하는 그 목소리를 귀로 따라 들어야 했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푸른 물감처럼 뺨을 타고 흘러내렸고, 내 에스코트를 받으며 차에서 내릴 때 그녀의 손이 빗방울에 젖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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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츠비는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로, 아령이라도 든 것처럼 두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 침통하게 내 눈을 바라보며 물구덩이 속에 서 있었다.
여전히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은 그는 내 옆을 지나쳐 복도로 들어가더니, 마치 줄에 매달린 인형처럼 휙 돌아서서 거실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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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두 번째 단계를 지나 세 번째 단계에 접어든 것이 분명했다. 처음에는 당황해 어쩔 줄 모르고 기뻐하다가, 지금은 그녀가 자기 곁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그녀 생각에 골몰해 왔고, 끝까지 그것만을 꿈꾸어 왔으며, 이를 악물고, 말하자면 상상할 수 없는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기다려 왔던 것이다. 이제 그 반작용으로 너무 세게 감긴 시계의 태엽이 풀리듯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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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 불빛이 가진 놀라운 의미가 이제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는 생각이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그와 데이지를 떼어 놓았던 엄청난 거리에 비하면, 그 불빛은 거의 그녀에게 닿을 만큼 무척 가까워 보였다. 달 주위에서 빛나는 별처럼 가까워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불빛은 부두에 켜진 초록 불빛에 지나지 않았다. 그를 사로잡았던 대상의 숫자가 하나 줄어든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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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선 바람 소리가 거셌고, 해협을 따라 천둥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이제 웨스트에그에는 불빛이 환했다. 사람을 실어 나르는 전철이 빗속에 뉴욕을 떠나 집으로 달리고 있었다. 인간의 마음에 깊은 변화가 일어나고, 대기에 흥분이 번지는 그런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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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인사를 하러 그들 쪽으로 갔을 때, 나는 개츠비의 얼굴에 되돌아온 어리둥절한 표정을 목격했다. 지금 누리는 행복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희미하게 의심하는 듯한 그 표정. 5년이라! 바로 그날 오후에도 데이지가 개츠비의 꿈에 못 미치는 순간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데이지의 잘못이라기보다 개츠비가 품은 엄청난 환상 때문이다. 그의 환상은 그녀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능가했다. 그는 창조적인 열정으로 그 환상에 직접 뛰어들어, 언제나 그 환상을 끊임없이 키워 가며, 자기 앞에 떠도는 빛나는 낱낱의 깃털로 그 환상을 장식했던 것이다. 어떤 강한 열정이나 순수함도 인간이 유령 같은 제 마음속 깊이 간직한 것에는 맞설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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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떨림과 열정이 그를 사로잡았던 것 같다. 그 목소리는 인간이 아무리 꿈꾸어도 지나치지 않은, 불멸의 노래와도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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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개츠. ─ 이것이 그의 진짜 이름, 적어도 법률상 그의 이름이었다. ─ 그는 열일곱 살에, 진짜 인생이 시작되는 바로 그 시점에 자기 이름을 바꾸어 버렸던 것이다. 그 시점이란 댄 코디의 요트가 슈피리어 호에서 가장 위험한 여울에 닻을 내리는 것을 보았던 바로 그 순간을 말한다. 그날 오후, 허름한 초록색 모직 셔츠에 면바지 차림으로 호숫가에서 빈둥거리던 순간까지는 제임스 개츠였지만, 노를 저어 투올로미 호(號) 가까이 다가가 반 시간 뒤면 거센 바람 때문에 배가 부서질지 모른다고 코디에게 알려 주던[49] 순간에는 이미 제이 개츠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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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미 오랫동안 그 이름을 준비해 왔는지 모른다. 그의 부모는 무능하고 실패한 농부였다. ─ 그의 상상력으로는 그들을 도저히 부모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 사실, 롱아일랜드 주의 웨스트에그에 사는 제이 개츠비는 그가 꿈꾸던 자기 자신의 모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만약 이 문장에 뭔가 의미가 있다면, 문자 그대로 바로 그런 의미였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일, 즉 거대하고 속되며 겉만 번지르르한 아름다움에 봉사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열일곱 살짜리 소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제이 개츠비 같은 인물을 꾸며 내어, 그 이미지에 끝까지 충실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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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려드는 졸음이 생생한 장면을 망각으로 에워쌀 때까지, 그는 매일 밤 상상의 무늬를 늘려 나갔다. 얼마 동안은 그런 환상이 상상력에 돌파구를 제공했다. 환상은 현실이란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일 수 있는지 만족스럽게 보여 주는 증거였고, 세상이라는 반석이 요정의 날개 위에 안전하게 잘 놓여 있다고 보증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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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남겨진 것이라고는 유난히 적절한 교육뿐이었다. 이제 제이 개츠비라는 모호한 윤곽은 실체를 갖춘 한 인간으로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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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는 음악에 맞춰 허스키하고 리드미컬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단어 하나하나마다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어떤 의미를 실어 보냈다. 음이 높아지면 그녀의 목소리도 알토 가수처럼 부드럽게 멈췄다가 다시 이어지곤 했다. 그런 순간마다 그녀의 따뜻하고 인간적인 마력을 공기 중에 조금씩 풀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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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자요, 오빠.」 데이지가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나를 떠나 불 켜진 계단의 꼭대기를 더듬었다. 열린 문으로 그해 유행하던 단정하고 서글픈 왈츠, 「새벽 3시」가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격식이라곤 차리지 않는 개츠비의 파티에는 그녀의 세계에 전혀 없던 낭만적인 가능성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를 다시 집 안으로 부르는 듯한 그 노래 속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 걸까? 이 알 수 없는 어두운 새벽에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질까? 믿기 어려운 손님이, 모두를 놀라게 할 아주 귀한 손님이 올지도 모른다. 한순간의 마법 같은 만남으로, 개츠비를 단 한 번 슬쩍 본 것만으로 한 점 흔들림 없이 헌신해 온 지난 5년간의 세월을 깨끗이 날려 버릴 눈부시게 아름다운 아가씨가 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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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츠비는 더도 덜도 말고 데이지가 톰에게 가서 〈한 번도 당신을 사랑한 적 없어요〉라고 말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녀가 그 말로 지난 4년의 세월을 지워 버려야, 그들은 보다 현실적인 대책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중 하나는 자유로워진 그녀와 함께 루이빌로 돌아가 그녀의 집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었다. 5년 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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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어느 가을날 밤, 그들은 낙엽이 떨어지는 거리를 걷다가 나무 한 그루 없이 달빛이 하얗게 길을 비추는 곳에 이르렀다. 그들은 거기 멈춰 서서 서로 마주 보았다. 1년에 두 번 계절이 바뀔 때처럼 그렇게 신비로운 흥분이 감도는 서늘한 밤이었다. 실내에 켜진 조용한 불빛이 어둠 속에 환히 퍼졌고, 별들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개츠비는 보도블록이 진짜 사다리가 되어 나무 위 비밀 장소까지 올라가는 모습을 곁눈으로 따라갔다. 혼자라면 그 비밀 장소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그곳에 가면 생명의 젖꼭지를 빨고,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신비한 젖도 마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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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의 하얀 얼굴이 그에게 다가올수록 그의 심장은 점점 더 빨리 뛰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아가씨와 키스하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의 꿈을 곧 사라질 그녀의 숨결과 영원히 결합시키면, 그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처럼 다시는 뛰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소리굽쇠가 별에 부딪히며 내는 아름다운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잠시 기다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의 입술이 닿자 그녀는 그를 위해 꽃처럼 피어났고, 상상하던 일은 완벽한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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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츠비가 굳은 표정으로 내게 돌아섰다.
「이 집에선 아무 말도 못 하겠어요, 친구.」
「데이지는 아무 생각 없이 말해요.」 내가 말했다. 「하는 얘기라곤 죄다……」
나는 머뭇거렸다.
「죄다 돈 얘기죠.」 개츠비가 불쑥 내뱉었다.
바로 그거였다.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데이지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안에서 무한히 오르내리는 매력, 그것이 짤랑대는 소리, 그 심벌즈의 음악…… 드높은 하얀 궁전의 공주, 황금의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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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누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전혀 의식하지 못했고, 사진에 피사체가 서서히 현상되듯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얼굴에 하나하나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이 이상하게도 낯익었다. 여자들 얼굴에서 자주 봤던 표정이기도 했지만, 아무튼 머틀 윌슨의 얼굴에는 목적 없고 설명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이윽고 나는 질투와 공포로 커진 그녀의 두 눈이 톰이 아닌 조던 베이커에게 고정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조던을 톰의 아내로 착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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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마음이 혼란스러워질 때보다 더 혼란스러운 것은 없다. 차가 달리는 동안 톰은 심각한 공황 상태에 빠졌다. 한 시간 전만 해도 범접하지 못할 안전한 곳에 있던 아내와 정부가 갑자기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데이지를 따라잡기 위해, 동시에 윌슨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그는 본능적으로 가속기를 밟아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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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 앞으로 10년 동안 외로울 거라는, 아는 독신자 수가 줄어들고, 열정이라는 서류 가방이 얇아지고, 머리카락이 빠질 거라는 전망. 그러나 내 곁에는 조던이 있었다. 데이지와 달리 그녀는 너무나 똑똑해서 까맣게 잊어버린 꿈을 해를 넘겨 가며 간직하지 않는다. 어두운 다리를 지날 때, 그녀는 나른한 듯 창백한 얼굴을 내 코트 어깨에 기댔다. 서른 살이라는 나이가 주는 충격은 살며시 감싸는 그녀의 손길 아래서 사라졌다.
그렇게 우리는 서늘해진 황혼을 지나 죽음을 향해 계속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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