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을 배워서

밝아졌다.
글자를 써 내려갔다. - P15

새 책상

읽고 쓰는 것이 좋아
새 책상을 샀어
나는 시를 썼어 - P16

처음 말놀이

장난치다가 다쳤다
문이 저절로 닫혔다

진도가 너무 느리다
바지 길이를 늘이다

내가 돋보기를 잘 맞췄다
내가 받아쓰기를 잘 맞혔다
오늘은 수업을 일찍 마쳤다

기도하느라 밤을 새웠다 - P17

학교 가는 길

내 이름을 쓰면서
너무 기뻐서 울었어

학교 갈 때는
너무 좋아서 웃었어

우리 자식들 손주들 이름을 다
쓸 수 있게 되었어

소원이었어

시험 볼 때는
너무 두근두근해

그래도 학교는 좋아 - P18

평생 알고 썼지만

? 물음표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었어

!느낌표
외치고 싶을 때가 있었어

, 쉼표
잠깐 쉬어 가야 할 때가 있었어
그리고, 강경장에 가서,
떡, 오이, 파, 시금치를 샀어

글자로 쓰고 싶었어 - P19

가르쳐 주는 대로 다 배우고 싶은데

머릿속에 안 들어가니까 참
속상해요 자꾸 배운 걸 까먹어요
젊은 사람들이 열 글자 배우면
저는 한 글자 배워요
그래도 한 글자씩 들어가긴 해요 - P20

나는 시험 볼 때 왜 두근두근하나

시험이 두렵고 떨려서 두근두근한 게 아니라
시험이 좋아서 두근두근한 거예요
시험을 볼 수 있다니 잠을 못 잤어요 - P21

캄캄했어요

버스를 타려고 해도
글자를 모르니까 캄캄했어요

손주들이 그림책 가지고 와서
물어볼까 조마조마했어요

면사무소에 가려고 해도 서류 같은 거
작성하라고 할까 봐
주눅이 들었어요

글자를 아니까 사는 게 재미있어요
이젠 간판도 술술 읽고
노선표를 확인하고 버스를 타요
학교 다니는 재미로 살아요 - P22

생각나서 쓴다

74년을 살았는데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74년을 살았는데
소원은 공부를 잘하는 것이다

책 한 권이 인생을 바꾼다
계획표를 짜면 시간을 아낄 수 있다
받아쓰기 공책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병원에 들렀다가 생각나서 쓴다 - P23

결혼식 날

12월 14일 결혼식 날
눈이 퍼부어 댔다
머리하러 시내 가다가
강경 나루 못 건너
동네 미장원에서
머리 올리고
얼마나 추웠으면
겨우 마련한 장롱이
쩍 하고 갈라졌다
이십 리 길 트럭 타고
시집가는데
세 살 때 돌아가셨다는
아버지 생각
어머니가 개가하시며
데리고 간 동생 생각 - P33

고달픈 나의 삶

농사짓는 게 힘들어
남의 땅에서 시작했어
너무 힘들어 기계가 없었어
다 손으로 손으로 심고 손으로 심고
도시로 떠나고 싶었어
일을 해야 하는데
일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잠이 오고 잠이 오고
못줄 옮겨 가면서 다 손으로 심고 나면
돼지도 먹이고 소도 먹이고

강경에 살 때가 생각나 어렸을 때
이모 집에서 얹혀살 때
물을 길러 다녀야 했어
내일 중에 하나였어
몸이 작았는데 어렸었는데
물동이를 지고 십 리를 걸어갔다가
십 리를 걸어왔어
힘들어도 내 일이니까
해야 했어 살아야 하니까
엄마가 내 곁에 없었으니까 - P37

대추 한 간 같은 인생

작은아버지 이사 간대서
쌀 열 가마니에 대추밭을 샀네

예쁜 대추들을 팔아
살고 싶었네

오갈병이 왔네
다 오그라졌네

가을날 붉은 대추
보고 싶었네

열 배 가득 베어도
대추 보였네

보름달 초승달
수없이 지켜봤네 - P39

엄마 반찬이 생각 안 나

강경장 젓갈
200년 전통이 있는 젓갈 반찬

밴댕이젓 아가미젓 가리비젓
갈치속젓 토하젓 어리굴젓
오징어젓 황새기젓 낙지젓
명란젓 꼴뚜기젓 창난젓
이렇게나 많은데

엄마 반찬은 생각이 안 나엄
마 생각도 잘 안 나
엄마가 날 이모 집에 놓고 갔어
동생만 데리고

그건 잊히지가 않는가 봐
할머니가 됐는데도 - P40

시가 될 수 있나요

제가 여기 나온 이유는 시인이 되고 싶어서예요
글을 배우면서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게
시 쓰기였어요

글자가 글이 되고 시가 될 수 있나요
아직은 몇 개의 단어밖에 못 쓰는데
시가 될 수 있나요

인생과 생각들
자식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들
시로 표현하고 싶어요 - P45

한국어로 가득한

받아쓰기 너머
따라 쓰기 너머

내 이야기를 쓰고 싶어 - P46

내가 처음 그린 그림

출렁대는 바다를 보면
내 마음도 화해진다 - P49

나의 황금기는 지금이에요

시인 선생님과 함께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있잖아요

맨날 밖에 있던 남편은
이제 집에 있어요. - P50

무슨 시가 쓰고 싶어요?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 모두 행복해지는 시

한결같은 시

우리 손주가 좋아하는
쪽파김치 같은 시

보고 싶을 때
걸려 오는 전화 같은 시

우리 만났으니
사랑하는 시

그렇게 한결같은
- P51

사랑하는 아들, 딸에게

항상 열심히 살아 줘서 고맙다
우리 언제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자
사랑해 엄마가 - P56

그래도 나를 막지는 못하지

옛날에는 진짜 태어난 것을 원망했지
학교는 문턱도 못 가
집안일에 돈 버는 일에 정신 나가 살았고

어느 날 눈을 펴 보니
글을 몰라 까막눈이요.
잘 안 들려 까막 귀요
코로나로 입을 막는 마스크 입만 있으니

그래도 나를 막지는 못하지
공부를 해 보네
사는 맛이 다르거든

밝은 세상도 봐야지 갈 때까지
천사님이 부르시면 콩게 가야지 - P59

자꾸자꾸 사람이 예뻐져

나 학교만 좀 가르쳐 줘 했어
창피해 교실 문 두드렸을 때, 가나다라
평생 교육원 7년 전 이름 석 자
기쁜지 슬픈지도 모르고 울었어
처음 글을 썼을 때도 울었어 나
시 쓰자고 전화 왔을 때 너무 좋았어
병원에서 목소리가 들떠 있었어
글자를 쓰면 자꾸자꾸 사람이 예뻐져

스물다섯
첫아이 가졌을 때도 부끄러웠어
임천에서 남편을 만나서 시부모님도 없이
부끄러웠어 딸 낳았을 때
그때는 그랬어

그래도 두 번째는 당당했어
막내아들 낳고 밥 먹기 얼마나 당당했는지 몰라
우리 막내 안 낳았음 계속 낳았을지도 몰라
지금 돌아가도 그대로일 것 같아
사람을 낳으면 자꾸자꾸 사람이 예뻐져

사람은 사랑을 받아야 해
사랑 있는 사람과 사랑 없는 사람이 차이 많이 나 - P61

나는 사랑하는 것이 쉬워졌어요

무지개 그림을 그릴 때랑 쪽파김치를 만들 때
나는 자꾸 출렁이는 마음이 돼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밥을 차려 줄 때도 그래요
바다처럼 출렁출렁 춤을 추잖아요
내가 아는 사랑의 리듬이에요 - P64

그래도 보고 싶은 엄마

천국에 계신 엄마
엄마에게 섭섭하고 서운한 게 많았어요

뒷동산에서 동생이 보고 싶어서 울었어요
보고 싶은 마음, 알아주는 사람 없었고
나무를 흔들고 나무를 쳐 봐도 소용이 없었어요

엄마는 동생만 데리고 갔었지요
이모 집에 있는 동안
나는 귀퉁이에 웅크리고 숨어 있는 것 같았다고
이제야 말해요.

나는 작아지는 일만 하고 있었어요
친구들은 다 배우고 있었는데
나만 쓸모없는 존재가 된 것 같았어요
나만 빼고
모두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있었어요

밥을 하기 위해서 불을 피우면
연기가 쏟아져 얼굴을 덮쳤어요
엄마가 나에게로 쏟아지는 것 같았어요

엄마가 그래도 나를 위해
기도를 해 주시는 것 같았어요

엄마가 없어서 슬펐지만 나 고맙소
잘살고 있으니
나 걱정하지 말아요
엄마는 어떻게 두고 가셨나요 많고 많은 세상
엄마 돌아가시는 날에 비가 많이 왔었지요
6월에

엄마
나는 뜨거운 눈물 속에서 잘 있어요
고생만 하고 가신 엄마
불러 보고 싶은데 못 부르는 내 엄마 - P69

미운 생각은 다 버리겠어요

미운 생각 옆에 있으면 미워져요
예쁜 생각 옆에 있으면 예뻐져요

아이들도 밉다고 하면 미워져요
예쁘다고 말해 주면 예쁘게 자라나요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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