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만남들로 우리의 평범한 순례 여행은 즐거워진다. 우리는 스치듯 지나는 순수한 애정의 순간을 누린다. 그래서 더 나아갈 수 없으며 절대 선을 넘어갈 수도 없다. 그는 깨끗한 남자고, 내 친구와 아이들을 사랑한다.
비록 누구와도 내 인생을 나누지 않지만 따뜻한 포옹만으로도 충분하다. 양쪽 뺨에 가볍게 입 맞추고, 산책을 떠나고, 함께 잠깐 걷는 것만으로. 원하기만 하면 잘못된 그리고 부질없는 어떤 길로 들어설 수도 있다는 걸 우린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안다. - <내가 있는 곳>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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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모든 쓰라린 고랑은 봄과 관련돼 있다. 하나같이 아픈 상처다. 이것 때문에 짙푸른 녹음, 시장에 처음 나온 햇복숭아, 동네 여인들이 입는 살랑거리는 플레어스커트가 괴롭다. 상실, 배신, 실망만을 떠오르게 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마지못해 앞으로 떠밀려 가야 하는 느낌이 싫다. 하지만 오늘은 토요일이라 나갈 필요가 없다. 눈을 뜨지만 일어날 필요가 없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 <내가 있는 곳>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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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는 꿈도 계획도 많다.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아직 믿는다. 이미 세상에 대항할 용기를 가졌으며 이곳에서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나가고 싶어 한다. 이 소녀가 난 사랑스럽다. 어떤 식으로든 그 애의 에너지가 영감을 준다. 동시에 나를 떠올리며 의기소침해진다. 그 애가 자신을 따라다니는 남자애들 얘기와 웃음이 터져 나오는 재미난 일화들을 들려줄 때 무력감을 지울 수 없다. 겉으론 웃지만 속으론 가슴 아프다. 난 그 나이 때 사랑을 몰랐다. - <내가 있는 곳>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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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리에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수첩을 꺼내 두 여자가 한 남자를 두고 지내온 평행 관계를 시시콜콜 상세히 비교해보았다. 휴가, 기억에 남는 순간들, 허리 통증, 감기. 가슴 찢어지는 긴 이야기였다. 서로 주고받은 자세한 정보와 자료는 의문을 풀어주며 나도 모르는 사이 꾸었던 악몽을 환히 밝혀주었다. 우리는 악몽에서 살아난 두 생존자였고, 그래서 이제 서로 공모자같이 느껴졌다. 그녀의 모든 말과 모든 폭로가 내게 상처를 줬다. 하지만 인생이 산산조각 나는 동안 난 홀가분해지는 걸 느꼈다. 태양이 지고 우리는 배가 고팠다. 더는 할 말이 없어지자 우리는 허기를 채우려고 밖으로 나갔다. - <내가 있는 곳>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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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날 못 미더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외로움은 결핍일 뿐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엄마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려 하지 않는다. 내가 만들어나가는 작은 만족들은 엄마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나에 대한 엄마의 집착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내가 보는 시각에는 관심이 없다. 내게 진짜 외로움을 가르쳐준 것은 바로 이 격차다. - <내가 있는 곳>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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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이 눈을 감고 내가 있건 말건 상관없이 긴 의자 위에 몸을 누인다. 눈을 감은 채 가지런히 누워 있다. 그렇게 그녀는 그 방을 살려내고, 내가 늘 조심스레 건넜던 그 문턱을 넘어와 완전히 방을 소유한다. - <내가 있는 곳>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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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에서 나는 생활에서 멀리 떨어진다. 생각이 녹아 장애물 없이 술술 풀려나간다. 물이 날 보호해주고 무엇도 건드리지 않기에 몸, 마음, 우주 전체가 참을 만해지는 듯하다. 수영장 바닥에 불안한 명암을 투사하며 연기처럼 흘러가는 빛의 유희를 몸 아래로 관찰한다. 날 재생시켜주는 요소가 감싼다. 내 어머니는 물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 <내가 있는 곳>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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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 상실과 불행을 느끼면서 수영장의 물은 이제 그렇게 맑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이 물은 고통과 고뇌를 알고 있고, 오염됐다. 일단 다시 흘러 들어온 물도 알 수 없는 불안에 침범당한다. 그 모든 고통은 이따금 귀로 들어가는 물처럼 다시 흘러나오지 않는다. 아니 정신 속에 고이고, 몸 구석구석에 배여 있다. - <내가 있는 곳>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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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존재는 성적 욕구 같은 것을 일으키지 않은 채 날 편안하게 해준다. 뭔가 채워지지 않은 우울한 시선, 이제 예닐곱 시간 눈을 붙이려 하는 반짝이지만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그의 두 눈을 생각한다.
다음 날 우리는 각자의 방문을 열고 나와 같은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서 헤어진다.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약속한 것도 아닌데 서로를 기다린다. 사흘 동안 이 침묵의 관계는 희미하게나마 날 세상과 화해하게 해주었다. - <내가 있는 곳>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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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공짜나 마찬가지인 빵 값을 지불한다. 엉덩이를 붙일 곳을 찾다가 놀이 공원에 앉는다. 밤에는 텅텅 비지만 이 시간에는 아이들, 부모들, 강아지들, 나 같은 외로운 사람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오늘은 전혀 혼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떠드는 소리가 시끄럽다. 자신을 표현하고 설명하고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려는 우리의 충동에 난 새삼 놀란다. 믿어 마지않는 소박한 빵맛에 또 새삼 놀란다. 햇살에 몸을 녹이며 빵을 먹는 동안 성스러운 음식을 먹는 것 같다. 이 동네가 날 사랑한다는 걸 안다. - <내가 있는 곳>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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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여름 사막에서 암초처럼 쌓인 더미, 이 홍수 같은 물건들은 모든 것의 실종을 생각나게 하지만 존재의 진부하고 완고한 흔적 역시도 떠올리게 한다. - <내가 있는 곳>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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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돼서도, 지금 기억나는 또 다른 중요한 순간이 있다. 새 집으로 이사하기 전에 우리가 사랑을 나눴던, 내 처녀성을 잃었던 방을 청소하던 첫 남자친구와의 일이다. 그는 바닥에, 침대 아래, 안락의자 쿠션 사이에 떨어져 잊고 있던 동전을 버리고 싶어 했다. "아무 가치가 없어, 그걸 주워봐야 아무 소용 없어"라고 그가 말했다. 그는 몇 년 동안 가구 뒤에 쌓인 먼지 더미와 함께 그 동전들을 모두 쓸어 버렸다. 순간 나는 우리의 관계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가슴 아프지만 명확히 깨달았다. - <내가 있는 곳>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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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욕을 받은 나는 피곤한데도 다시 걸어서 집으로 돌아온다. 사십 분 동안 어두컴컴한 건물들, 닫힌 창문들 아래를 급히 걷는다. 긴 산책 뒤에도 당혹감을 지울 수 없고 너덜너덜해진 기분이다. 저녁을 망친 것에 친구에게 사과를 할 것이다. 내일 아침 장을 보러 내려갈 광장을 가로질러 간다. 오늘 저녁은 분수대에서 잡담을 나누는 청년들에게 담배 한 대를 부탁한다. - <내가 있는 곳>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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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결혼한 적이 없지만 많은 여자들이 그러하듯 몇몇 유부남과 사귀었다. 오늘 나는 강 건너 동네에 자리한 이 카페에서 만났던 한 남자를 생각한다. 지금 이 카페에 나는 혼자 있다. 그날 나는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막 카페를 나오던 중이었다. 그가 따라와 길에서 날 붙잡았다. 그는 내 뒤를 미친 사람처럼 뛰어왔다. - <내가 있는 곳>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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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인은 지금 공원에서 시끄럽게 소리치며 놀고 있는 아이들보다 더 활기가 넘쳐 보인다. 끈으로 연결된 두 사람의 이미지가 날 감동시킨다. 그들 사이의 헌신, 연결된 삶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난 우리 안에 흐르는, 순환되어야 하고 규칙적으로 제거돼야 하는 물질을 생각한다. 숨겨진, 흉하지만, 중요한 작업들.
그들은 이야기하면서 조심조심 걷는다. 그녀는 다른 곳에서 고통 없이 누워 힘든 수술을 받고 난 뒤 수술실에서 깨어나 이 세계로 다시 들어왔을 것이다. - <내가 있는 곳>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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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때 침대에서 책을 읽으면 집 아래로 쌩쌩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점점 내게 안정감을 준다. 아무튼 이 소리가 들려야만 잠들 수 있다. 그러다가 한밤중 언제나 같은 시간에 잠을 깬다. 쥐 죽은 듯한 고요 때문이다. 그 순간 거리를 달리는 차도,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도 없다. 잠이 점점 가늘어지며 날 떠난다. 누구라도 좋으니 어떤 이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그 어둠의 시간에 들어서는 생각은 늘 가장 어둡고 또렷하기까지 하다. 첫 아침 햇살이 어두운 생각을 흩어놓고, 삶의 동반자가 집 아래로 지나가는 소리가 다시 들릴 때까지 그 침묵이 검은 하늘과 함께 날 움켜잡고 있다. - <내가 있는 곳>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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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문구점이 시내 한가운데 인적이 붐비는 두 길 모퉁이 옛날 건물에 있다. 연말에 그곳에 가서 아끼는 구매 물품인 새 수첩을 산다. 연말에 수첩을 사는 건 하나의 의식과 같다. - <내가 있는 곳>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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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문구점은 내 중심 거점이다. 학생 시절 나는 늘 그곳에서 학교와 대학교에서 필요한 물건, 지금은 수업을 가르치는 데 필요한 물건을 사곤 했다. 필요한 것이기도 했지만 문구점에서 산 물건들은 모두 날 행복하게 해준다. 내 존재를 확인해준다. - <내가 있는 곳>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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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럽기는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문구점이 더 이상 없다는 게 놀랍지는 않다. 이 지역 월세는 지나치게 비싸겠지. 그리고 누가 문구점에 가서 그 노트들을 샀겠는가? 학생들은 사실 손으로 글씨를 쓰지 않는다. 정보를 얻고 세상을 여행하자면 자판만 두드리면 된다. 학생들의 생각은 화면에서 돋아나고, 누구든지 이용 가능한 존재하지 않는 구름 속에 산다. - <내가 있는 곳>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6026 - P126

하루에 세 번 사흘 동안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내 친구의 아버지가 땅에 묻힐 때까지 우리는 같은 길을 산책한다. 난 늘 호기심에 찬 개의 두 눈, 재빠른 발걸음, 뭔가를 갈망하는 주둥이가 사랑스럽다. 우리의 여정은 점점 더 날 저쪽으로 데려간다. 개는 날 끌고 가지만 난 개목걸이를 꼭 잡고 있다. 엇나간 사랑이 깨지고 우리의 부족한 사랑 이야기가 더는 그리워지지 않을 때까지 한 걸음 한 걸음 날 위험으로부터 멀리 데려간다. - <내가 있는 곳>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6026 - P134

어린 시절 그 나무 그루터기 위에서, 그 절벽 앞에서 맞닥뜨렸던 것과 같은 당혹감을 느꼈다가 이제 불안한 평정심을 다시 찾는다. 내가 부주의하고 너무 바쁜 나쁜 딸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엄마는 흥분하지 않고 침착하게 모든 얘기를 풀어놓는다. 난리를 치지도 않고 목소리도 더는 높이지 않는다. 엄마는 자신에 대해 말할 뿐 날 비난하지 않는다. 엄마는 말수가 적어졌지만 내 나이 때는 화를 잘 냈다. 나는 여름에 이웃들이 듣지 못하도록 창문을 잠그고 엄마의 분노를 집 안에 가두고 싶었다. - <내가 있는 곳>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6026 - P141

보통 어느 순간쯤 되면 우리는 내려가 함께 산책을 하곤 했다. 엄마는 불편하게 엉거주춤 내 손을 잡는다. 엄마가 주는 애정이 난 살짝 귀찮다. 하지만 오늘 엄마는 나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피곤해한다. 공기가 엄마에겐 쌀쌀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쇠약해진 엄마를 보니 마음에 눈물이 어린다. - <내가 있는 곳>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6026 - P142

지금 나의 엄마는 스크랩북의 누런 스카치테이프 조각처럼 삶에 붙어 있다. 자신의 일을 하다가 어느 순간 떨어질 수 있다. 거기서 떨어지려면 페이지를 넘기고 종이 위에 빛바랜 네모난 얼룩을 그냥 놔두면 된다. - <내가 있는 곳>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6026 - P146

튜브 뚜껑을 닫다가 실수로 튜브를 눌러서 많은 양의 접착제가 밖으로 흘러나왔고 손가락을 덮더니 곧 피부에 딱딱한 얼룩을 남기며 말라버린다. 손을 씻어도 상황이 더 악화되기만 한다. 물은 도움이 되지 못해서 이제 손가락이 케이크 조각처럼 다른 손가락과 붙어버렸다. 접착제가 묻은 뻣뻣한 손을 하고 있는 생기 없는 내 모습을 거울로 본다. 지우고자 애썼던 먼지를 접착제가 내 피부에 다시 끌어모았다. 오랜만에 처음으로 웃음이 터져 나온다. - <내가 있는 곳>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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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무리의 그 무엇도, 그들의 게걸스러운 즐거움조차 내게 남지 않았다. 작은 테이블은 다시 깨끗해졌고 자리는 비었다. 지금 나는 그 많은 음식을 하나도 맛보지 않은 걸 후회한다. 그들은 친절하게도 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않았다. - <내가 있는 곳>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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