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는 또 헛되이 버스 정류장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그녀는 기다릴 것이다. 처음엔 몇 분을, 그다음엔 몇 시간을, 몇 날 며칠을 기다릴 것이다. 시간이 아무 의미가 없어질 때까지, 마을이 해체될 때까지, 집들이 무너져 내릴 때까지, 도라와 버스 정류장만 남을 때까지, 먼지 자욱한 광활한 땅 위에 ‘종말’이라는 작품명의 초현실주의 유화처럼 굳어버린 채로 말이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109

그녀를 그리워할까? 여하튼 그녀는 모든 게 미안하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헤어진 게 아니다. 그저 잠시 떨어져 지낼 뿐이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연방정부가 봉쇄령 문제와 관련해 어떤 조치를 내놓든 상관없이, 코르프마허 교수가 새 파트너와 함께 베를린으로 와서 도라와 악셀을 만나게 할 때면 꼭 이런 일이 생긴다. 주임 의사인 그가 지닌 의학 전문 지식은 미디어의 담론과 대중의 흥분을 넘어 그의 존재를 돋보이게 한다. 그러니까 현 상황에서 고집스럽게 가족 소모임을 갖자는 건 바이러스를 경멸하는 그의 방식인 거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118

"1미터 50센티짜리 좌석이에요." 포니테일 머리의 남자가 말하고는 웃으며 운전석 좌석과 연결된 옆자리를 두드린다. 실제로 그 자리는 코로나로 거리두기를 하고 앉을 수 있다. 하지만 도라는 낯선 사람의 배송차를 타도 될지, 건축자재 마트에서 만난 사람이라면 이젠 낯선 사람이 아닌지 생각해본다. 베를린이라면 이런 초대에 응하는 건 자살행위일 거다. 근데 이곳에선 몇 주일 치 장 본 물건을 들고 작은 지붕조차 없는 버스 정류장에서 두 시간 반을 기다리는 게 오히려 자살행위일지 모른다. 차 뒤쪽 화물칸 같은 곳엔 이 남자가 자루째 구입한 화초용 옥토가 실려 있다. 성폭력범은 절대로 옥토를 사지 않는다는 걸 제시하는 범죄 통계가 분명 있을 거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131

분명한 건 세상에 도라보다 힘이 조금 더 센 사람뿐 아니라 열 배는 더 센 사람도 있다는 거다. 톰이 연신 허리를 구부리자 입고 있던 해진 노르웨이산 스웨터도 딸려 올려간다. 그 바람에 도라는 곱슬곱슬한 그의 가슴털이 아래 배꼽까지 나 있는 걸 보게 된다. 왠지 톰의 모습을 감상해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배가 볼록한 편이지만 살이 찐 건 아니고, 팔과 어깨는 기계처럼 움직인다. 인간의 몸이란 얼마나 서로 다른가. 여기 이 남자의 몸은 그녀의 몸과 손과는 다른 물질로 만들어진 것 같다. 근데 도라의 손은 톰의 손과 조금 닮아 있다. 톰의 몸은 땅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있기라도 한 듯 플립플롭 샌들을 신고 있는 발 위에 고정돼 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132

높이가 높은 좌석에 앉아 가는 덕분에 도라는 차창 밖으로 멀리 지나가는 들판을 바라보며 드라이브를 즐긴다. 톰은 정상적인 속도를 유지하며 핸들, 페달, 기어를 다루는데, 마치 날 때부터 그것과 함께하며 자란 거 같다. 이런 차를 가진 사람의 삶은 어떨까. 건축자재 마트의 물건을 절반이나 사서 싣고 집으로 돌아오고 언제든 짐을 몽땅 싸서 이사를 가고 차에서 지낼 수 있을 테지. 또 필요하면 온 가족을 데리고 도망갈 수도 있겠지.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132

농사짓는 사람들이 독일 땅 절반에 비닐을 씌우고 있는 동안, 도라는 면 에코백을 들고 장 보러 간다. 그녀는 배 속에서 스멀스멀한 느낌이 올라오길 기다려보지만 아무 기척이 없다. 한순간 얼어붙은 듯이 가만히 머릿속으로 그 광경을 그려본다. 잘 다져진 밭고랑 귀퉁이, 거기에 씌운 검은 비닐. 곤충을 닮은 기계. 구부정한 사람들의 어두운 실루엣. 여기에 빠진 건 약간의 피아노 음악뿐이다. 시대착오적인 미래주의. 기계에 의한 인간의 노예화.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133

"아스파라거스는 마피아 같은 거예요. 슈퍼마켓을 모두 꽉 잡고 있지요. 소상공인은 거기 들어갈 수 없어요. 여느 다른 곳도 마찬가지죠. 대기업은 장려하지만 소상공인은 망하지요. 가장 최근엔 대국민 사기극 때문에 가게 장사가 너무 안 돼 우리 사람들을 빌려줄 수밖에 없었어요."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134

도라는 재차 로베르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그녀는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감을 갖고 있으며 자기 자신을 초인간으로 여긴다고 비난한 적이 있었다. 숭고한 진리를 품고 있다는 이유로 자신을 니체가 말한 초인간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보다 아는 것도 능력도 허용되는 것도 더 많은 사람으로 생각한다고 말이다. 그 말에 로베르트는 격노해서 사람들을 위해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했다. 도라가 바로 그 점을 왜 문제라고 생각하는지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142

연신 흙에 코를 박는 요헨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문득문명의 충돌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깨닫는다. 동양과 서양 간 문명의 충돌뿐 아니라 베를린과 브라켄 간, 대도시와 지방 간, 도심과 변두리 간 문명의 충돌도 존재한다는 걸.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145

요요가 보기에 잘나가는 여성 법률가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건 사법 국가고시를 치는 것만큼이나 가치 있는 일이 틀림없다. 반대로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학 공부를 중단하고 광고 분야에서 일하면서 생태 활동가인 남자와 사귀다 헤어지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시골 마을 사람들과 살고 있는 도라는 완전 골칫덩이가 돼버린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147

‘선한 사람’과 그의 불행에 몰두하면 할수록, 도라는 그를 더 좋아하게 된다. 그녀 자체가 ‘선한 사람’이고,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선한 사람’이다. 아마 고테를 제외하고는. 새 이웃집 여자에게 침대를 만들어준 그라 하더라도 말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방법으로 이 무자비한 세상을 헤쳐나가고 긍정적인 걸 보태며 혼란스러운 것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를 쓴다. 개개인의 추진력이 얼마나 강하고 얼마나 다운돼 있는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돕는 본능을 갖고 있다. 그녀가 만들어낸 ‘선한 사람’은 아이러니한 시대정신을 담은 캐리커처로서, 계속 생산되는 청바지를 가능한 한 많이 팔아야 한다. 근데 이 ‘선한 사람’은 세상에 스며든 허무함에도 불구하고 그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아주 인간적인 바람의 아이콘이다. 이는 희극적이고 비극적이며 특히 실존적이기도 하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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