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런 지지도 필요 없다. 그래도 스스로를 잘 돌본다. 사람 키보다 더 크고 나이 많은 나무에 둘러싸인 도라는 그저 하찮은 존재로 느껴진다. 그녀는 곤충들이 윙윙대는 소리 때문에 숲의 적막감이 깨지지 않고 한층 더 짙어지는 걸 사랑한다. 살랑거리는 은빛 나뭇잎과 달콤한 향이 나는 솔잎도, 또 분주히 날아다니는 새들도 사랑한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71

언제부턴가 그는 산책 나갈 시간이 없었고, 그 때문에 도라는 마음이 아팠는데, 쓰라린 아픔이라기보다는 처음엔 그녀 자신도 거의 못 느끼는 은은한 아픔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기후 보호에 대한 로베르트의 관심이 높아졌고, 그레타 툰베리가 금요 시위를 시작한 이래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점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텔레비전에 비친 로베르트는 환영을 보듯 둥근 얼굴, 꼭 다문 입술, 땋은 긴 머리의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74

로베르트는 바이러스가 지구를 사회의 이동성으로부터 해방하므로 어떤 점에서 보면 축복이기도 하다고 했다. 그때 도라는 그를 떠날 거라는 걸 깨달았다. 그 후 어느 날 요헨과 함께 산책 나가는 걸 금지하자, 그녀는 그의 곁을 떠났다. 서른여섯 살의 그녀와 함께한 모든 것들이 렌터카 한 대에 다 들어갔다. 벨트 전동장치가 달린 자전거 구스타프만 베를린에 남겨두고 와야 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80

도라 주위에서 봄이 살아 움직이며 본연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모든 생물 유기체가 성장하고 만발케 하고, 살아 있는 생명이 최대한의 생산력을 뽐내도록 몰아대고, 봄의 전령들이 재생산을 하도록 돕는다. 그 어떤 존재도 평가받지 않을뿐더러 모든 존재가 이용된다. 죽어가는 생명 또한 활용된다. 세상의 어떤 한 종이 사라지면 새로운 종이 그 틈을 메운다. 죽음과 탄생은 드라마가 아니라 생명 역학의 고리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의 흥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인류가 파멸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진박새보다 더 무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82

그녀의 의뢰 업체인 ‘공정무역 의류’는 생긴 지 얼마 안 된 베를린 패션 상표로, 신상 재생 청바지 상품을 출시할 예정이다. 문을 닫고 수익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소매상들이 간신히 버텨나가야 하는 시기인 지금, 보통 섬유 분야에 종사하는 많은 고객들이 주문을 동결하고 있다. 그 와중에 ‘공정무역 의류’ 창립자들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앞두고 중요한 모든 경로를 통해 대중의 이목을 끄는 상품을 선보이려는 계획에 매달린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85

수십 년 전부터 정치와 미디어 매체는 인간의 가장 저급한 본능—불안, 시기, 이기주의 같은—에 호소하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어느 순간 자신들처럼 엄살을 부리며 징징대는 정당을 뽑아도 놀랍지 않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92

그녀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인다. 실내에서 자고 있던 요헨이 한숨을 쉰다. 도라는 언제 어디서나 잠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요헨이 부럽다. 가끔 그녀는 잠드는 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는 생각을 한다. 잠들지 못하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은 이미 실패한 사람이다. 잘 자는 사람은 안전하다. 매일 밤 침대에 눕자마자 정신없이 곯아떨어지는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매일 아침 상쾌한 날을 맞이한다면?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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