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들이 하는 일이 중요하고, 필요하며, 둘도 없이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증명할 만한 무엇인가를 원했다. 두려움에 찬 노력이 의미 있고, 자신들이 필요로 하던 그 무엇이기를, 자기 자신을 알게 해주며, 변화를 가져다주고 살게끔 해주는 무엇이기를 원했다. 하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진짜 삶은 다른 곳에 있었다. 멀지 않은 장래에 온갖 위험, 알아채기 어려운 덫, 주문(呪文)에 싸인 계략과 같이 훨씬 미묘하고 은밀한 형태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67

전쟁이 끝났지만, 무엇이 변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들의 뇌리에 오랫동안 남은 유일한 인상은 무엇인가 완료, 종말,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이었다. 해피엔딩이나 극적인 결말 대신 따분하고 우울한 결말이었다. 뒤이어 공허하고 씁쓸한 느낌만 남아 추억들을 암울하게 몰아갔다. 시간이 더디게 갔다. 세월이 흘러갔다. 나이를 먹었다. 평화가 다시 찾아왔다. 그들이 일찍이 맛보지 못했던 평화였다. 학창 시절, 그들의 만남이 이루어진 시절, 삶의 절정이던 7년여의 시간이 한순간에 과거로 묻혔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68

아마 아무것도 바뀐 게 없을지 몰랐다. 여전히 창가에 서서 안마당, 아담한 정원, 마로니에를 바라보고 새들의 지저귐을 들었다. 흔들거리는 선반에 다른 책들, 다른 음반들이 쌓여 갔다. 오디오 턴테이블의 다이아몬드바늘이 닳아가기 시작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68

변한 것이 있다면, 전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너무나 모호한 것이었다. 그들의 남다른 삶의 방식, 몽상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들은 지쳤다. 그들은 늙었다, 그랬다. 어떤 때는 자신들이 인생을 채 시작하지도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들의 삶이 위태롭고 덧없이 흐르는 것 같았다. 마치 채워지지 않은 욕망, 불완전한 기쁨, 잃어버린 시간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기다림과 궁색함, 편협함이 자신들을 마모시켜 무력하게 만들었다고 느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69

가끔은 모든 것이 이대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계속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냥 흘러가게 놔두면 될 일이었다. 삶이 그들을 달래줄 것이다. 몇 달이고 몇 년이고, 변화도 없고 그들을 구속하는 법도 없이, 인생은 계속될 것이다. 낮과 밤이 조화롭게 이어지는 가운데, 거의 미미한 변화만 있을 뿐, 같은 주제가 끝없이 되풀이되며 행복이 계속될 것이다. 어떤 동요, 비극적인 사건이나 예기치 못한 사건도 흔들어놓지 못할 영원한 감미로움을 맛볼 것이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69

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 안에 있었다. 그들을 타락시키고, 부패시켰으며 황폐화시켰다. 그들은 속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조롱하는 세상의 충실하고 고분고분한 소시민이었다. 기껏해야 부스러기밖에 얻지 못할 과자에 완전히 빠져 있는 꼴이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70

그러나 우정 역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저녁나절, 비좁은 답답한 방에 모인 커플들이 사나운 눈길로 언성을 높이며 충돌하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결국 자신들이 공들여 만들어낸 이토록 아름다운 우정, 서로를 알아보기 위한 의례적 어휘들, 친밀한 우스갯소리, 공통의 세계, 공통의 언어, 공통의 몸짓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쪼그라든 세계, 맥 빠진 세계는 아무 비전이 없었다. 그들의 삶은 정복과 거리가 멀었다. 삶은 부서지고 흩어져 갔다. 자신들이 얼마나 매너리즘에 빠져 무력하게 되었는지 깨달은 것도 이쯤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공허함 외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다 같이 권태로움에 빠져들었다. 오랫동안 말장난과 술을 즐기고 숲 속에서의 산책이나 성대한 식사, 영화와 계획들에 관한 긴 토론, 그리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모험과 삶, 진실을 외면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가볍고, 시작도 미래도 없이 무의미하고 공허한 제스처일 뿐이었다. 수도 없이 되풀이하는 말과 손이 닳도록 하는 악수, 이 같은 의례적인 행동들이 이제 더 이상 그들을 보호해 주지 못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71

옛날 친구들이 견고한 서열 사회 속으로 거의 힘 안 들이고 잘 합류해 들어가서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 세계에 동조하는 것을 보았다. 옛 친구들이 굽실거리며 비집고 들어가 권력과 영향력, 책임감에 탐닉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친구들을 통해 자신들의 세계가 그들과 완전한 대척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새로이 알았다. 그 세계는 통틀어 돈, 일, 선전, 능력을 합리화하고, 경력을 높이 사는 세계, 자신들을 인정해 주지 않는 세계, 간부 직원들의 진지한 세계, 권력의 세계였다. 자신들의 예전 친구들이 머지않아 이 모두를 소유하게 되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73

그곳에는 그들의 욕망과 희망이 스며 있었다. 그곳에야말로 진정한 삶, 그들이 맛보고 싶고 영위하고 싶어 하는 삶이 있었다. 25년 전, 미용사와 회사원 부모 아래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여기 진열된 연어, 양탄자, 크리스털을 즐기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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