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넘게 구축되어 온 아파트 중심의 도시가 불편하다면, 모두 똑같이 생긴 공간에서 살며 서로 비교하고 돈으로 평가하는 삶터가 피로하다면, 이러저러한 이유로 우리처럼 아파트 담장을 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좀 더 다양한 선택지와 다듬어진 길이 보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집값만으로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계산법은 너무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개인들의 삶과 취향을 중심에 놓고 선택할 수 있는 집의 선택지가 다양해진다면 어떨까.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9
미국 건축가 루이스 칸은 "건물을 만드는 것은 인생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공간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표준화된 방 개수와 매매 가격만 따지는 아파트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획일화된 아파트 대신 너다운 집과 나다운 집이 많아진다면, 우리가 너무 쉽게 비교하고 평가하고 좌절하는 삶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10
어찌 보면 한국인의 유별난 카페 사랑도 결국 집에서 파생된 공간 문화다. 한국인은 공간을 소비하기 위해 카페로 간다. 카페는 이른바 ‘공유형 거실’이자 ‘모두의 거실’로 기능한다. 방의 집합체인 집과 달리 카페는 답답하지 않은 공간이다. 상업 공간이라 천장고가 높고, 통창도 많아 바깥 풍경을 감상할 수 있으며, 식물도 많다. 볕 좋은 날에는 테라스가 있는 카페가 인기다. 선글라스를 끼고 앉아 날씨를 즐길 수도 있다. 하지만 팬데믹 시대에는 함께 쓰는 카페가 위험해졌다. 집이 갑갑해지면 카페에 가던 한국인의 생활 패턴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16
하지만 그렇게 둘러본 늙은 삶터는 늘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다. 관통하는 이슈는 두 가지, 재개발 또는 재생이었다.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고, 도시의 생명을 연장한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같다. 허물고 아파트를 새로 짓거나(재개발), 허물지 않고 리모델링하는(재생) 식이다. 여기서 재생은 공공에서 주도한 ‘벽화 칠하기’ 재생이 아닌, 상권이 개발되면서 민간에서 주도한 동네 리모델링을 뜻한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22
집은 어느 날 우리에게 왔다. 마치 처음 만난 순간 이 사람과 결혼하겠구나 싶었다는 영화 대사 같아 정말 쓰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이다. 서울에서 시골 찾기를1년 넘게 했지만 마땅한 집을 찾을 수 없었다. 휴대전화 사진 폴더에 "서울에 많고 많은 집 중에 왜 우리 집은 없냐!"와 같은 타령을 얹은 술병 사진이 쭉쭉 늘던 어느 날이었다. 알고 지내던 목수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가 ‘집 찾아3만 리’를 꽤 오래 하고 있다는 걸 아는 이였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28
프랑스 태생의 스위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는 현대 건축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숱한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짓고서도, 말년에는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에4평짜리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나의 궁전’이라 부르면서 말이다.2017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르코르뷔지에의 건축 전시를 열었을 때 실제 사이즈로 구현해 놓은4평 오두막이 전시장에 놓여 있었다. 바다를 볼 수 있게 큰 창을 냈지만 실내는 매우 작았다. 집 밖으로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기에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지만,4평 오두막은 분명 우리에게 물었다. 정말 우리한테 필요한 삶터의 면적은 얼마일까.20평대 다음은30평대, 그다음은40평대 순으로 아파트 공급 면적에 따라 단계적으로 늘려가는 것이 순리인 양, 성공한 삶인 양 사는 것은 아닐까. 정말 내게 맞는 집의 크기는 어느 정도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집이 클수록 더 많은 물건들이 자리를 차지한다. 그 물건들은 정말 필요한 걸까. 아무래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당이었고, 한옥은 마당 품은 옛 나무집으로 여겨졌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31
하지만 서촌은 볕이 참 따스했다. 안온한 동네였다.2010년 서울시의 한옥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서촌은 무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골목길이 있는 동네다. 이 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작은 광장처럼 트인 공간이 나오는데, 사람들은 이곳을 ‘체부동 너른 마당’이라 불렀다. 집은 마당 끄트머리에 있었다. 너른 마당은 스페인 어느 소도시에서 미로처럼 꼬불꼬불한 길을 걷다 만난 소칼로(광장) 같았다. 골목길에 들어서는 순간 거짓말처럼 풍경이 바뀌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옛 서울로 온 것만 같은 분위기랄까. 너른 마당에는 어느 집에선가 널어놓은 고추가 볕에 바짝 말려지고 있었다. 차가 다니지 않는 사람 길이라 조용하고 편했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32
우리는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공유했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걷는 것을 운동이라 여기며 살고 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출퇴근만으로도 하루에1만 보는 거뜬히 채워진다. 물론 아주 가끔씩 차가 필요할 때는 공유 자동차를 이용하고 있다. 언젠가 서울을 떠나 대중교통이 불편한 시골로 가게 된다면 그때 차를 살 생각이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34
타인의 시선을 섞어 어렵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뚜벅이의 삶을 중심에 놓기로 했다. 아는 목수가 집의 존재를 알린 지 일주일 만에 우리는 집주인과 직거래하여 집을 샀다.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옛 동네의 무너져 내리고 있는 한옥이 우리 집이 됐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35
오로지 편의만을 좇느라 잊었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이치코는 추운 겨울 따끈한 찐빵을 먹기 위해 초여름부터 팥을 심었다. 팥 꼬투리를 일일이 따 수확한 뒤 팥알을 까서 잘 말리는 게 중요하다. 찐빵에 들어갈 팥소를 만드는 일도 만만치 않다. 팥을 삶을 때 설탕을 너무 빨리 넣으면 아무리 삶아도 팥이 무르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눌러 으깨질 참에 설탕을 넣어야 맛있고 달달한 팥소를 만들 수 있다. 편의점에서 쉽게 사 먹을 수 있는 찐빵은 실로 어려운 음식이라는 것, 팥을 수확하고 팥소를 만들기까지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영화는 담담히 보여준다. 작은 팥알이 여물어 팥소가 되고 찐빵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며 지금까지 애쓰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아주는 것 같아 위로를 받곤 했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40
환상의 팀플레이를 기억하기 위해 오늘날까지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는 것이 있다. 진택이 끈질기게 입고 또 입어 구멍이 여럿 난 팬티 두 장. 나는 낡디낡아 특히 구멍이 많은 것을 선별해 ‘낭(걸)인 팬티’라 이름 붙이고 가보로 보관하기 위해 고이 간직하고 있다. 볼 때마다 잠깐 아련하고 아주 오래 웃기다. 말로 아무리 설명하려고 해도 이 모습이 잘 전달이 안 된다.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비주얼을 가졌기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옛말을 잘 전달하는 작품이다. ‘어떻게, 얼마나 입으면 팬티가 이렇게까지 될 수 있는 거지?’ 싶어 절로 집중하게 만들기에 복잡한 세상의 시름을 잠시 잊게 한다. 무엇보다 매사에 ‘개썅마이웨이’ 정신으로 당당하게 살며, 최대한 서로 웃기며 즐겁게 살자는 정신까지 담은 훌륭한 가보다. 물론 오늘도 진택은 이 가보를 호시탐탐 버리려고 애쓰고 있지만. 나는 총력을 다해 아주 잘 감춰뒀고 평생 꺼내 보며 아련하게 오래 웃을 참이다. 큭큭.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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