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이 우리에게 제공한 혜택은 셀 수 없고, 과학의 발명과 발견이 가져온 생산력으로 얻게 된 온갖 풍요로움은 비할 데 없다. 더 행복하고, 더 자유롭고, 더 완벽하고자 인간이 만든 경이로운 창작품들은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수정처럼 맑게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새로운 삶이라는 샘은 고통스럽고 비루한 노동에 시달리며 이를 좇는 사람들의 목마른 입술에는 여전히 아득히 멀다.
맬컴 로리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8

먼저, 높고 좁게 난 긴 복도를 따라 깔린 잿빛 카펫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밝은색 패널을 이어 만든 벽에 구릿빛 꺾쇠가 반짝일 것이다. 벽에는 엡섬1)의 우승마 선더버드, 외륜선 빌`–드`–`몽트로호와 스티븐슨의 증기기관차를 찍어낸 판화 세 점이 줄지어 걸려 있고, 뒤이어 결이 훤히 드러난 짙은 색 굵은 나무 고리가 달린 가죽 걸개가 조금만 건드려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을 것이다. 이쯤에서 복도에 깔린 카펫 대신 노란색에 가까운 마루가 나타나고, 그 위로 빛바랜 양탄자 세 장이 군데군데 깔린 것이 보일 것이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0

너비가 3미터, 길이가 7미터 됨 직한 거실이 나타난다. 왼쪽으로 알코브2)처럼 보이는 곳에 낡은 검정 가죽 소파가 들여져 있고, 양옆으로 책들이 어지러이 쌓여 있는 밝은 빛깔의 자작나무 책장이 자리해 있을 것이다. 소파 위로 고해도(古海圖)가 한쪽 벽을 온통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낮고 작은 테이블 너머에 비단 기도 걸개가 가죽 걸개와 쌍을 이루어 굵은 못 세 개로 벽에 걸려 있고, 그 아래 검정 소파와 각을 이룬 밝은 밤색 벨벳 소파를 따라가다 보면, 검붉은색으로 니스 칠한 미끈한 다리의 작은 3단 장식장이 나타날 것이다. 그 안에 마노, 석란, 코담뱃갑, 사탕 상자, 비취 재떨이, 진주조개 껍데기, 은 회중시계, 장식 유리잔, 크리스털 피라미드, 타원형 세밀화 액자 같은 자잘한 장식품들이 보일 것이다. 조금 멀찍이 방음을 위해 쿠션을 댄 문을 지나면 구석의 선반 위에 상자와 음반들이 놓여 있고 그 옆에 매듭 모양의 금속 버튼이 네 개 달린 닫아놓은 전축 위로 「카루젤 축제의 대행진」 판화가 걸려 있을 것이다. 흰색과 갈색이 어우러진 크레통 사라사풍 커튼 사이로 창문 밖 나무 몇 그루와 아담한 공원, 막다른 길이 보일 것이다. 작은 등나무 의자가 딸린 고풍스러운 책상에는 종이와 필통 들이 어지러이 널려져 있을 것이다. 아테네 여신 모양의 받침대에 전화기, 가죽 수첩, 메모 용지가 놓여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문 너머에, 낮고 각진 회전식 책장 위로 흐드러지게 핀 노란 장미가 커다란 파란색 장식 화병에 꽂혀 있을 것이다. 그 위에 걸린 기다란 마호가니 거울을 지나 타탄체크의 긴 의자 두 개가 딸린 작은 테이블에 이르면, 아까의 가죽 걸개가 다시 보일 것이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1

온통 갈색, 황갈색, 적갈색, 노란색이다. 공들여 배합한 색조 때문에 고풍스러운 분위기인 이곳에서 쿠션의 생생한 오렌지빛이나 장정한 책들 사이로 얼룩덜룩한 책 몇 권이 밝은 점처럼 도드라질 것이다. 너울지며 들어오는 한낮의 햇빛 아래 장미꽃 화병이 놓여 있어도 거실은 조금 침울해 보일지도 모른다. 이 방은 저녁에 더 어울리는 공간일 것이다. 겨울이면, 젖힌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몇 줄기 빛을 통해 책장 구석이라든가 음반꽂이, 책상, 소파 테이블, 거울에 어린 희미한 모습들이 보일 것이다. 길이 잘 든 나무, 묵직한 느낌의 화려한 비단, 크리스털 조각, 부드러운 가죽, 모든 사물이 빛을 발하는, 사방이 어둠에 잠긴 이 방은 분명 평화의 항구이자 행복의 땅일 것이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