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우리의 골목길은 사람의 속도에 맞추어진 다양한 체험이 있는 길이고 휴먼 스케일human scale7에 가장 가까운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32
우리는 어쩌다 보니 이렇게 특별한 골목길의 공간을 얻게 된 것이다. 이는 도시계획자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구릉 지형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군락에 의해 만들어진 소중한 유산이다. 골목길은 예측 불가능한 다양한 환경이 서식하는 갯벌과도 같은 존재다. 반면 재개발을 통해 지어진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간척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과거 땅을 만들기 위해 갯벌을 메우고 간척 사업을 했다. 지금은 자연의 보고인 갯벌을 메우고 간척지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우매한 선택인지 알고 있다. 지금 도시에서 갯벌과 같은 골목길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자연 발생적으로 만들어진 갯벌의 생태계처럼 오랫동안 사람의 생활이 만들어 낸 골목길을 유지하고 보존해야 한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33
이언 모리스는 『가치관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에너지를 취하는 경제 시스템에 따라 가치관이 형성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수렵 채집 시대에는 부족이 함께 사냥하고 나누어야 했기 때문에 평등 사회가 만들어졌으며, 농경시대에는 재산 축척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계급사회가 만들어졌다는 식이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34
이와 같은 의인화된 시선으로 건축을 바라보면 무기물 덩어리에 불과한 건축물도 마치 의식을 가지고 본인이 철거되지 않고 더 오래 살아남기 위해 그 안에서 생활하는 인간에 맞춰 모습을 바꾸며 진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런 진화 현상을 ‘리모델링’, ‘리사이클링’이라고 부르고 최근 들어서는 ‘업사이클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37
건축에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오래된 화두가 있다. 루이스 설리번이라는 근대건축의 첫 장을 장식한 건축가의 말이다. 이 말은 모든 형태는 특정한 기능을 위해 필연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우리가 자연을 관찰하면 이 말이 얼마나 잘 들어맞는지 알 수 있다. 기린의 목이 긴 이유는 높은 나뭇가지의 잎을 따 먹기 위함이고, 가자미의 눈이 한쪽 면에 두 개 붙은 것은 포식자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바닥에 붙어 살다 보니 눈이 한쪽으로 돌아가서 그렇게 된 것이다. 자연의 디자인은 이렇듯 필연적 이유에서 발생한 결과다. 이는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 때 아주 유용한 철학이다. 자동차를 처음 디자인한 사람은 기능적 이유에서 엔진과 네 개의 바퀴를 생각해 냈을 것이다. 비행기의 날개와 프로펠러도 기능적 이유에서 생겼다. 처음 만들어지는 것의 디자인은 이처럼 ‘기능’에 근거한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39
하지만 건축물에 ‘시간’이라는 요소가 첨가되면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명제가 항상 성립되지는 않는다. 런던의 화력발전소로 사용되다 더 이상 쓸모없어져 문을 닫은 건물이 시간이 지나 ‘테이트 모던’이라는 미술관이 되었다. 최초의 테이트 모던은 화력발전소의 형태에 맞게 디자인되었지만 커다란 증기터빈이 있던 자리는 이제 미술관의 전시 공간으로 바뀌었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도 좋은 예다. 원래 기차역으로 사용되던 이 공간은 기차 엔진이 강력해지면서 길어진 객차를 수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기존 플랫폼이 짧아 더 이상 제 기능을 못하게 된 것이다. 애물단지로 전락한 이곳은 사용되지 않고 버려져 있다가 수십 년 후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최초에 건축물을 계획했던 목적과 달리 시대가 변하면서 건축물이 필요 없어질 때가 생기는데, 그때 건축물이 그대로 있으면 철거되고 소멸된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 그 건축물은 그 시대의 필요에 맞게 살아남기 위해 ‘진화’를 한다.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말이다. 테이트 모던과 오르세 미술관 모두 주어진 건물 형태에 맞추어 새로운 기능을 덧입은 경우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40
사실 우리가 창조라고 하는 것들은 어차피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닌, 자연에 있는 물질의 재구성일 뿐이다. 우리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자연으로부터 잠시 빌려 쓰는 행위다. 그러니 내가 다 쓰고 나면 후손들이 다르게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업사이클링도 잠시 빌려 쓰는 행위다. 현재 지구상에는 역사상 가장 많은 인간 개체 수가 있고 모두가 살아남아야 하는 어려운 숙제를 안고 있다. 어느 때보다 나누어 쓰고 다시 쓰는 업사이클링이 필요한 때다. 우리 시대에 태어난 건축물은 다음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어떤 진화의 몸부림을 치게 될지 궁금하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42
상대를 존중하고 나의 개성을 표현하면서 앙상블을 만드는 것이 재즈와 결혼과 리모델링의 공통점이다. 독주나 독신이 가능하듯이 건축도 혼자서 멋질 수 있다. 어쩌면 혼자가 더 폼 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좋은 결혼을 통해 좋은 가정과 좋은 자녀가 탄생하듯이 잘 이루어진 리모델링은 혼자서는 만들기 어려운 예상치 못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 리모델링 건축은 기본적으로 시간이 담긴 건축이다. 바로 그 시간이 감동을 준다. 리모델링은 과거와 현재의 건축가가 시간을 사이에 두고 펼치는 타임 슬립 드라마이며, 두 건축가가 펼치는 이중주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50
이처럼 무거운 건축물은 권력을 과시하는 장치다. 반대로 가벼운 건축물은 아무런 권력을 나타내지 못한다. 몽골제국의 텐트는 가볍다. 그래서 텐트는 아무런 권력을 보여 주지 못했다. 반면 농업경제에 기반을 둔 로마인들에게는 그리스와 메소포타미아문명으로부터 물려받은 건축 문화가 있었다. 로마인들에게는 무거운 콜로세움을 건축했고 그것을 바라보는 정복지의 원주민들은 로마 군대가 철수한 다음에도 감히 로마제국에 도전할 생각을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원주민들은 그런 어마어마한 건축물을 본 적도 건축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건축 문화의 유무가 두 제국의 운명을 가른 것이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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