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지식 청년의 지적 반항’이라는 평을 들은 『거꾸로 읽는 세계사』에는 예전의 내가 있었다. 열정은 넘치지만 공부는 모자란, 열심히 배우지만 사유의 폭은 좁은, 의욕이 지나쳐 논리적 비약을 일삼는, 공감하기보다는 주장하는 데 급급한, 현학적 문장을 지성의 표현으로 여기는, 글쓰기의 기초가 약한 젊은이가 보였다. 그런 모습으로 누구의 서가에 놓이는 것을 더는 감당하기 어려워서 책을 거두어들였다.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8661 - P11
오래된 책을 다시 쓰면서 세상과 나의 변화를 돌아보았다. 달라진 세상을 대하는 소회는 「에필로그」에 적었으니 여기에서는 ‘나의 변화’만 이야기한다. 나는 역사의 발전을 예전처럼 확신하지 않는다. 사회적 불의와 불평등을 집단적 의지와 실천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지만 한 번의 사회혁명으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인간 이성의 힘을 신뢰하지만 생물학적 본능의 한계로 인해 호모사피엔스가 스스로 절멸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반항하는 청년’이 ‘초로(初老)의 남자’가 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과학자들 덕분에 인간의 물리적 실체와 생물학적 본성에 관해 더 많이 알게 되어 그러는지도 모른다.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8661 - P12
"나는 최후의 승리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더욱 강한 확신으로 거듭 말씀드립니다. 진실이 전진하고 있으며,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진실이 땅속에 묻히면 조금씩 자라나 엄청난 폭발력을 획득하며, 마침내 그것이 터지는 날 세상 모든 것을 날려버릴 것입니다. 오늘 나의 행위는 진실과 정의의 폭발을 앞당기기 위한 혁명적 수단일 뿐입니다. 나의 불타는 항의는 영혼의 외침입니다. 부디 나를 중죄 재판소로 소환해 푸른 하늘 아래에서 조사하기를 바랍니다. 기다리겠습니다." ■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나는 고발한다』, 책세상, 2005, 106·108쪽.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8661 - P35
19세기 막바지에 프랑스에서 벌어진 사건이 왜 지금도 사람의 마음을 끌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첫 번째 이유는 ‘인간적 요소’일 것이다. 드레퓌스 가족은 서로 믿고 사랑했다. 그 사랑과 믿음으로 참혹한 불운과 시련을 이겨냈다. 반전을 거듭한 드라마의 주인공들,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의 누명을 벗기려고 부당한 비난과 박해를 감수하며 싸운 사람들의 이야기는 문학의 향기를 풍긴다. 모든 것을 걸고 진실을 드러낸 피카르 중령, 지성과 열정의 화신 졸라, 끝까지 책임을 다한 클레망소, 언론의 선동과 반유대주의자의 집단 광란을 이성의 힘으로 이겨낸 시민들, 프랑스의 민주주의가 허물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재심 요구파를 지지하고 응원하고 연대한 세계의 지식인들, 그들은 인간이 어리석고 때로 기괴하지만 지적 재능과 선한 본성을 지닌 존재임을 증명했다.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8661 - P44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식민지의 민족주의자들은 윌슨 대통령의 말을 오해했다. 그가 거론한 ‘식민지 문제의 공정한 해결’은 식민지와 종속국의 자주권을 존중하거나 보장한다는 뜻이 아니라 패전국의 식민지를 적절하게 재분배하자는 말이었다. ‘민족자결주의’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를 포용한 오스만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옛 영토를 처리하는 원칙이었을 뿐이다. 제국주의 식민지 쟁탈전은 끝나지 않았고, 더 무서운 전쟁이 인류를 기다리고 있었다.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8661 - P70
제1차 세계대전은 돈과 권력을 향한 탐욕이 과학혁명의 날개를 달고 벌인 참극이었다. 그런 일을 겪고도 인류는 무력행사를 절제하는 능력을 기르지 못하고 겨우 20여 년 뒤에 더 끔찍한 전쟁을 또 벌였다. ‘위대한 조국’을 들먹이며 민중을 현혹해 싸움터로 내모는 권력자와 정치인은 지금도 있다. "과학기술은 발전하지만 인간정신은 진보하지 않는다." 독일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의 말은 진리가 아니어도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다.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8661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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