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하루하루는 가뭇없이 사라져간다. 무엇 때문에 내일을 걱정한단 말인가. 오늘이야말로 모든 것에 대한 훌륭한 해답이 되어줄 것을. 당신 안에는 신을 향한 미소 어린 믿음과도 흡사한 난공불락의 태평스러움이 자리한다. 당신은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차라리 아이들에게서 배운다.

-알라딘 eBook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 P13

변함없이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 늘 그렇듯 거짓은 한마디도 찾을 수 없다. 통상적인 말, 실체가 없는 말은 단 한마디도 들어 있지 않다. 관념을 섬기고 거짓을 섬기는, 구름 잡는 말은 하나도 찾을 수 없다. 그녀는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이야기하며 당신으로 하여금 세상을 투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해준다. 조급한 목소리로 병적인 지성을 과시하는 신문기자들의 말보다 세상을 훨씬 더 투명하게 보게 해준다. 그녀의 글이 당신 마음에 와닿는 건 당신이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맛보는 감동과도 흡사하다. 꾸밈없는 현존과, 세상을 깃털처럼 가볍게 만드는 존재 방식.
-알라딘 eBook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 P19

사랑은, 그리고 사랑의 가볍고 경쾌한 자각이자 더없이 겸허한 형상이며 각성한 얼굴인 시(詩)는, 심오한 기다림이고 달콤한 기다림이다. 부드럽고도 오묘하게 반짝이는 희망이다.

-알라딘 eBook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 P22

피로는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생각거리들 중 하나이다. 피로는 질투 같고, 거짓말 같고, 두려움 같다. 우리가 애써 외면하는 이런 불순한 것들을 닮아 있다. 그것들처럼 피로는 우리를 땅으로 내려서게 한다. 삶에서 처음 마주치는 피로의 얼굴은 어머니의 얼굴이다. 고독에 지친 얼굴이다. 갓난아이는 꿈과 웃음, 그리고 무엇보다 피로를 가져다준다. 피로가 맨 먼저이다. 밤은 강탈당하고 행복이 숨통을 조여 온다. 사랑과 잠. 피로는 삶의 이 신성한 두 문에 대번 손을 댄다. 피로는 돌 위를 흐르는 물처럼 사랑을 마모시키며, 물에 물을 가져다 붓듯 잠을 쌓아간다. 피로는 사랑을 침범해 들어오는 미개한 잠이며, 광대한 사랑의 숲에 번지는 잠의 불이다. 피로는 나쁜 어머니 같다. 밤중에도 일어나 목소리로 우리를 달래고 품에 안아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그런 어머니가 아니다. 피로에 절은 사람들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그들은 무언가를 쉴 새 없이 하는 사람들이다. 휴식과 침묵, 사랑이 내면으로 파고들 여지가 없는 사람들이다. 피로에 절은 사람들은 장사를 하고, 집을 짓고, 경력을 쌓는다. 피로를 피하기 위해 그런 일들을 하지만 그러면서 오히려 피로에 빠진다. 그들의 시간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일을 더 많이 할수록 점점 더 적게 하는 꼴이 된다. 그들의 삶에는 삶이 부족하다. 자신과 자신 사이에 유리벽이 존재한다. 그들은 멈추지 않고 유리벽을 따라 걷는다. 피로는 그들의 용모와 손과 말에서 드러나 보인다. 그들에게 피로는 일종의 향수이며 불가능한 욕망과도 같다. 그들은 페르스발처럼, 어머니를 떠난 이 젊은 남자처럼, 들판과 강을, 강과 숲을, 산과 들판을 오간다.

-알라딘 eBook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 P24

장사와 피의 대가와 영예로운 전쟁이 맹위를 떨치던 그런 시대에, 음유시인들은 한 여인의 이름을 입에 담고 자신들의 노래가 솟구치게 한다. 청명한 하늘에 푸른 불꽃이 치솟게 한다. 출구 없는 세상에 그들은 출구를 만들어낸다. 세상 모든 언어를 통틀어 하나밖에 없는 이름의 문이다.

-알라딘 eBook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 P26

당신은 마음 내키는 대로 책을 펼친다. 정오의 햇빛을 받으며 깊은 독서에 빠진다. 그 시커먼 불길 속으로, 가시투성이 꽃 속으로 들어간다. 〈이피게네이아〉이다. 무수한 굴곡과 에움길과 갈팡댐으로 이루어진 이야기, 여덟 폭 피륙과도 같은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전개되어 감에 따라 점점 더 빛을 발하는 광막한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비단결처럼 청명한 하늘이다.

-알라딘 eBook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 P28

위대한 책은 그 책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에 시작된다. 어떤 책이 위대하다는 건, 그 책에서 점차 드러나 보이는 절망의 위대함을 의미한다. 책 위에 무겁게 드리워져 책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한참을 가로막는 그 모든 어둠을 의미한다. 책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 책이 있기 전, 글이 써지기도 전에 모든 것이 시작된다.

-알라딘 eBook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 P29

당신의 눈 속, 삶의 저변. 즉 근원에 가 닿는 또 다른 독서만이 당신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당신 안에 자리한 책의 뿌리로 직접 가닿는 독서, 하나의 문장이 살 속 깊은 곳을 공략하는 독서.

-알라딘 eBook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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