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원하는 것에는 언제나 그 이상의 것이 있다. 너는 훗날 네 아이들을 위해 이 집을 꿈꾸고, 이곳에서 누리게 될 고독을 원한다. 네 남편들은 결코 견디지 못하고 외면해버리는 고독, 네 아이들조차 보지 않는 고독을 너는 이 집에서 누리길 원한다. 생통드라 언덕 위의 얼마 안 되는 고독, 생각하고 꿈꾸고 책을 읽고 기다리는 텅 빈 공간, 너에게 말을걸 때 네가 더는 ‘현재시제‘로 대답하지 못할 이 세상의 집 한 칸, 고독과 빛과 고요로 감싸인 도피네의 작은 처소를 너는 원한다. - P87
그들이 보기에는 여자를 붙들어둘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 결혼이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면, 결혼생활을 월급 받는 일이나 토요일마다 장을 봐야 하는 일처럼 피할 수 없는 부역이나 고역으로 여긴다. 아내를 맞이하고 난 후에는 더 이상 아내를 생각하지 않으며, 컴퓨터 게임을 하고 선반을 고치고 정원에서 잔디 깎는 기계를 돌린다. 이는 악천후처럼 고난 가득한 삶에서 그들이 휴식하는 방법이며, 떠나지 않고 떠나는 방법이다. 남자에게는 결혼과 함께 무언가가 끝난다. 여자는 반대여서 무언가가 시작된다. - P89
여자는 반대여서 무언가 시작된다. 여자는 청소년기부터 자신만의 고독으로 곧장 나아간다. 고독과 결혼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독을 향해 곧바로 나아간다. 고독은 체념일 수도 있고 힘일 수도 있다. 결혼을 하고 나서 여자는 그 둘 모두를 발견한다. 결혼은 여자들이 가장 자주 원하는 이야기다. 여자들만이, 오로지 그들만이 은밀히 꿈꾸고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하는 이야기. 하지만 때로는 진저리치며 달아나기도 한다. 그들은 혼자가 되기 위해, 그로써 충만해지는 자신을 찾기 위해 떠난다. - P89
두 번째 얼굴은 당연히 너의 얼굴이다. 첫 번째 얼굴과 닮았는데, 마치 네거티브 필름과 인화된 사진처럼 모든 것이 똑같지만 반전되어 있다. 너의 광기는 삶으로 향해 있다. 너는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가장온전한 사람이다. 세상이 시작된 날부터 모든 여자들이 바라던 것을 너는 원했다. 네가 원한 건 자유와 사랑, 자유 속에서 열려 있는 사랑, 사랑 안에서 행하는자유였다. 그건 불가능한 일일까? 그렇다, 불가능하다. 그러나 너는 그렇게 살았고, 그런 삶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상처를 입고, 시련을 겪어도 멈추지 않았다. 자유로운 여성들조차 결코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그녀들은 언제나 두 전쟁 사이에서 살아간다. - P105
너를 상상한다. 핫초콜릿을 마시는 너, 낡은 보라색 실내가운을 걸친 너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워크맨만이 사라졌을 뿐, 하늘의 목소리는 니체나 키르케고르, 파스칼의 목소리보다 훨씬 더 명료하고 정확하다. - P107
우리는 사랑하는 이에게 말과 쉼과 기쁨을 포함한 많은 것을 줄 수 있다. 네가 준 가장 귀한 것은 그리움이다. 나는 너 없이 지낼수 없었고, 너를 보고 있어도 여전히 네가 그리웠다. 내 정신의 집, 내 마음의 집은 이중으로 잠겨 있었다. 네가 창문을 깨뜨린 후에야 공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얼음처럼 차갑게, 불타듯 뜨겁게, 손에 잡힐 듯 또렷하게. 지슬렌, 너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너로 인한 그리움과 공허와 고통마저도 내 안으로 들어와 나의 가장 큰 기쁨이 된다. 그리움, 공허, 고통 그리고 기쁨은 네가 내게 남긴 보물이다. 이런 보물은 결코 고갈되지 않는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죽음의 시간이 올 때까지, ‘지금‘에서 ‘지금’으로 가는 것뿐이다. - P110
이곳은 시간이 얼마 없을 때 네가 자주 가던 산책코스다. 나는 걸으면서 다음번 책은 너에 대해 쓸 거라고, 너에 대해서만 쓸 거라고 말한다. 너는 웃는다. 첫문장도 이미 정했다고 네게 말한다. ‘내가 이 생에 감사한다면, 그건 네가 있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이다. 너는 걸음을 멈추고 네가 만일 세상에 없다면 무엇을 쓸 거냐고 묻는다. 미처 생각도 하기 전에 답이 떠오른다. 나는 심사숙고하지 않고 떠오른 답을 그대로 말한다. 마음에 드는 답은 아니지만, 뒤죽박죽 끼어드는 생각을 그대로 말하는 버릇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내가 네게 말한다. 언젠가 네가 더는 이 세상에 없다 해도, 계속해서 이 삶에 감사하고 사랑할 것이라고, 너는 웃음을 터뜨리며 환한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아주 좋아. 그렇게 하는 게 훨씬 좋지. 다음번 책에 그 말을 그대로 쓰겠다고 약속해줘.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문학을 하는 거야. 문학을 해서는 절대로 안 돼, 글을 써야지. 그건 전혀 다른 거거든. 약속해.’ 나는 네게 약속한다. 그리고 우리는 곧바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간다. - 그때 우리는 이미 죽음에 대해 잊어버렸다. 공기를 가르며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이 아직도 한참이나 멀리 있는 것처럼.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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