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여름에 그는 학문에 대한 과거의 열정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젊음이나 나이와는 상관이 없고 현실과도 유리된, 호기심 많은 학자의 열정으로 그는 아직까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은 유일한 삶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다 보니 절망의 순간에도 자신이 그 삶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323

"이번 강의의 가장 중요한 자료는……." 스토너가 말했다. "루미스와 윌러드의 선집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 가지 시각에서 중세 운문과 산문을 공부할 겁니다. 첫째,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닌 문학작품으로서, 둘째, 영문학 전통에서 문학적인 문체와 방법론의 시초를 보여주는 사례로서, 셋째, 담화의 문제에 대한 수사학적이고 문법적인 해결책으로서. 이 해결책은 어쩌면 오늘날에도 실질적인 가치와 응용 가능성을 지니고 있을지 모릅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325

그의 청각장애는 조금 묘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자신과 직접 대화하는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시끄러운 방 안 저편에서 사람들이 낮게 웅얼거리며 나누는 대화는 완벽히 알아들을 때가 많았다. 이 청각장애 술수를 통해서 그는 자신이, 젊은 시절 유행하던 표현을 빌리자면, ‘캠퍼스의 괴짜’로 여겨지고 있음을 점차 알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336

마침내 이디스는 지칠 대로 지쳐서 거의 고마운 심정으로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강렬하던 분노는 점점 누그러져서 스토너의 형식적인 관심처럼 형식적인 수준이 되었다. 길고 긴 침묵은 상대의 무관심을 공격하는 수단이 아니라, 스토너가 더 이상 개입하지 않는 개인적인 공간으로 물러나는 수단이 되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340

공격이 끝난 뒤 아이는 한가할 때마다 거의 항상 제 방에 혼자 틀어박혀 아버지가 열두 살 생일선물로 준 작은 라디오를 들었다. 정리하지 않은 침대에 꼼짝 않고 누워 있거나 책상에 꼼짝 않고 앉아서 협탁에 놓아둔 땅딸막하고 못생긴 기계의 소용돌이무늬 속에서 가늘게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마치 그 목소리, 음악, 웃음소리만이 그녀의 정체감을 채워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정체감마저 그녀가 다시 불러올 수 없는 저 먼 침묵 속으로 흐릿하게 사라져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344

그녀의 내면에 있던 어떤 것이 느슨하고 말랑말랑하고 절망적으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그녀의 내면에 있던 무정형의 어떤 것이 몸부림을 치며 밖으로 풀려나와 이제 어둡고 비밀스러운 자신의 존재를 구현해 내라고 그녀의 몸을 설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344

스토너는 아이의 변화를 지켜보며 슬픔을 느꼈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만을 보여주었다. 죄책감이라는 편안한 사치품을 자신에게 허락할 수는 없었다. 타고난 본성과 이디스와의 생활이라는 조건을 감안할 때, 지금까지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 깨달음이 죄책감보다 훨씬 더 슬픔을 부추겼고, 딸에 대한 사랑은 더욱 깊어졌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344

아이가 워낙 섬세한 도덕적 본성을 타고났기 때문에 계속 그 본성을 보살피고 키워주어야 하는 드물고 사랑스러운 인간에 속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주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이처럼 세상과 이질적인 본성이 도저히 집이라고 할 수 없는 곳에서 살아야 했다. 부드러운 애정과 조용한 생활을 갈망하는 본성이 무관심과 무정함과 소음을 먹고 자라야 했다. 그런데 그 본성은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는 그 이상하고 유해한 환경 속에서도 사나움을 얻지 못해서 자신에게 맞서는 잔혹한 세력과 싸워 물리치지 못하고 그저 조용한 곳으로 물러나 작게 웅크린 채 고독하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345

그 옛날 방에서 그와 나란히 앉아 엄숙하고 기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딸의 모습,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린 그 사랑스럽고 작은 아이의 모습만이 머리에 떠오를 뿐이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357

두 사람은 오랜 친구처럼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스토너는 그레이스가 직접 말했던 것처럼 절망을 거의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레이스는 해가 갈수록 술을 조금씩 더 마셔서 공허해진 자신의 삶에 맞서 스스로를 무감각하게 만들면서 하루하루를 조용히 살아갈 터였다. 그는 그녀에게 적어도 그런 생활이라도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레이스가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364

스토너가 캐서린 드리스콜의 소식을 들은 것은 딱 한 번뿐이었다. 1949년 초봄에 동부의 대형 대학 출판부에서 보낸 광고전단이 그에게 날아왔다. 거기에 캐서린의 책이 출판된다는 소식과 함께 그녀에 대한 설명이 몇 마디 적혀 있었다. 그녀는 매사추세츠의 훌륭한 교양학부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으며, 미혼이었다. 그는 최대한 빨리 그 책을 구해 보았다. 그 책을 손에 쥐자 손가락들이 생명을 얻어 살아나는 것 같았다. 손가락이 너무 떨려서 책을 펼치기도 힘들었다. 맨 앞의 몇 장을 넘기자 헌사가 보였다. "W. S.에게."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365

그가 짐작했던 것만큼 훌륭한 책이었다. 문체는 우아했고, 명석한 지성과 냉정함이 열정을 살짝 가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글 속에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지금도 그녀의 모습이 어찌나 생생한지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갑자기 그녀가 바로 옆방에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그녀와 함께 있다가 온 것 같았다. 방금 그녀를 만졌던 것처럼 손이 저릿거렸다. 그 상실감, 그가 너무나 오랫동안 속에 담아두었던 그 상실감이 쏟아져 나와 그를 집어삼켰다. 그는 의지를 넘어 그 흐름에 휩쓸리는 자신을 내버려 두었다. 자신을 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기억을 향해 미소 짓는 것처럼. 이제 자신은 예순 살이 다 되었으므로 그런 열정이나 사랑의 힘을 초월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366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 가지가 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詩)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367

스토너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마치 방금 의사에게서 들은 일이 조금 거추장스러운 일에 불과한 것 같았다.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끝내기 위해 어떻게든 에둘러 돌아가야 하는 장애물 같은 것. 이런 일이 벌어진 시기가 조금 늦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로맥스가 그를 대신할 사람을 구하기 힘들 텐데.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378

그레이스가 왔다. 하지만 그는 결국 그레이스에게 할 말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레이스는 세인트루이스가 아닌 다른 곳에 가 있다가 어제야 돌아와서 이디스의 편지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지치고 긴장한 모습이었으며, 눈 밑에 검은 그림자가 져 있었다. 스토너는 딸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줄여주고 싶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395

"넌 아주 예쁜 아이였다." 그의 귀에 자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그는 이것이 누구에게 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빛이 눈앞에서 어지럽게 빙빙 돌다가 형체를 갖추더니 딸의 얼굴로 변했다. 주름이 지고, 우울하고, 걱정 때문에 초췌해진 얼굴이었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서재에서…… 기억하니? 내가 일할 때 네가 내 옆에 앉아 있곤 했지. 너는 아주 조용했고, 빛이…… 빛이……." 책상의 스탠드 불빛(이제 그 불빛이 생생히 보였다)이 책이나 그림에 아이답게 푹 빠져 있는 그레이스의 작은 얼굴에 흡수되어 그 매끈한 살갗이 방의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났다. 멀리서 아이의 작은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렇지." 그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 아이의 지금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랬어." 그가 다시 말했다. "넌 항상 거기 있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397

그는 책을 거의 읽지 않았지만, 책이 옆에 있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었다. 그는 이디스를 시켜 모든 창문의 커튼을 열게 했다. 뜨겁게 이글거리는 오후의 햇빛이 방 안으로 비스듬히 비쳐들 때에도 그는 커튼을 닫지 못하게 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398

내가 좀 더 강했더라면.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더라면. 내가 이해할 수 있었더라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무정한 생각을 했다. 내가 저 사람을 좀 더 사랑했더라면.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399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 그는 우정을 원했다. 자신을 인류의 일원으로 붙잡아줄 친밀한 우정. 그에게는 두 친구가 있었지만 한 명은 그 존재가 알려지기도 전에 무의미한 죽음을 맞았고, 다른 한 명은 이제 저 멀리 산 자들의 세상으로 물러나서……. 그는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결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열정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열정이 죽어버렸다. 그는 사랑을 원했으며, 실제로 사랑을 했다. 하지만 그 사랑을 포기하고, 가능성이라는 혼돈 속으로 보내버렸다. 캐서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캐서린."
그는 또한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지만, 거의 평생 동안 무심한 교사였음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알고 있었다. 그는 온전한 순수성, 성실성을 꿈꿨다. 하지만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몰려드는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는 생각했다. 또 뭐가 있지?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403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그의 의식 가장자리에 뭔가가 모이는 것이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406

그는 책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그 책은 그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책장을 펄럭펄럭 넘기며 짜릿함을 느꼈다. 마치 책장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짜릿한 느낌은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그의 살과 뼈를 훑었다. 그는 그것을 어렴풋이 의식했다. 그러면서 그것이 그를 가둬주기를, 공포와 비슷한 그 옛날의 설렘이 그를 지금 이 자리에 고정해 주기를 기다렸다. 창밖을 지나가는 햇빛이 책장을 비췄기 때문에 그는 그곳에 쓰인 글자들을 볼 수 없었다.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자 책이 고요히 정지한 그의 몸 위를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빨리 움직여서 방의 침묵 속으로 떨어졌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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