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로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위로하는 좋은 말들처럼 평탄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의 인생 역시 어려움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보다 훨씬 더 뒤처져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좋은 말들을 찾아낼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중 - P9
삶이 쉽지 않은 것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 인생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작가 기리노 나쓰오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보다 좋은 내일, 내일보다 좋은 모레, 매일매일 행복한 나. 제멋대로 미래를 꿈꾸는 것도 미망에 홀리는 것이다. 이것이 정도를 넘으면 죄를 짓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꿈이 결락되어 있는 인간은 무력한 사람이 된다. 인생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삶을 사랑한 나머지 지나치게 행복을 꿈꾸어도 죄를 짓게 되고, 아예 꿈을 꾸지 않아도 무력해진다. 자기 아닌 것을 너무 갈망하다 보면 자기가 소진되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 자신이 왜소해 진다. 그래서 인간은 가끔은 탁월한 무언가가 되고 싶기도 하다가 또 어떨 땐 정녕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기도 하다. - P11
삶이 쉽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타인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게 인생이라는 데 있다. 타인과 함께하지 않고는 의식주 어느 것도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 이 사회에서 책임 있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가능한 한 무임승차자가 되지 않으면서 자신의 생존을 도모해 낸다는 뜻이다. 인간은 타인과 함께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존재, 혹은 타인과 더불어 살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는 존재다. 즉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그러나 타인과 함께하는 일이 어디 쉬운가. 에세이스트 스가 아쓰코는 "우리는 혼자 있을 수 없었기에 벌을 받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 P12
정치가 어디 있냐고?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이 세상에 태어나 있고, 태어난 바에야 올바르게 살고 싶고, 이것저것 따져보고 노력해보지만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다른 사람과 함께 하려니 합의가 필요하고, 합의하려니 서로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합의했는데도 합의는 지켜지지 않고, 합의 이행을 위해 규제가 필요하고, 규제를 실천하려니 권력이 필요하고, 권력 남용을 막으려니 자유가 필요하고, 자유를 보장하려니 재산이 필요하고, 재산을 마련하니 빈부격차가 생기고, 빈부격차를 없애자니 자원이 필요하고, 개혁을 감행하자니 설득이 필요하고, 설득하자니 토론이 필요하고, 토론하자니 논리가 필요하고, 납득시키려니 수사학이 필요하고, 논리와 수사학을 익히려니 학교가 필요하고, 학교를 유지하려니 사람을 고용해야 하고, 일터의 사람은 노동을 해야 하고, 노동하다 죽지 않으려면 인간다운 환경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느닷없이 자연재해가 일어나거나 전염병이 돌거나 외국이 침략할 수도 있다. 공동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많고 쉬운 일은 없다. 이 모든 것을 다 말하기가 너무 기니까, 싸잡아 간단히 정치라고 부른다. 정치는 서울에도 지방에도 국내에도 국외에도 거리에도 집 안에도 당신의 가느다란 모세혈관에도 있다. 체지방처럼 어디에나 있다, 정치라는 것은. - P24
정치 공동체는 자연의 산물이다. 그리고 인간은 본성상 정치적 동물이다. 우연이 아니라 본성상 정치 공동체가 없어도 되는 존재는 인간 이상이거나 인간 이하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중 - P25
모두가 소풍을 원했지만 아무도 갈수 없었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상대를 설득할만한 의견을 내야 하고, 상대는 그 의견에 동의해 주어야 하고, 그렇게 모인 총의(總意)를 실천에 옮길 수 있어야 한다. 그도 아니라면, 꼭 가야겠거든, 소풍에 대한 결정을 타자에게 위임하기라도해야 한다. 그저 자기 선호를 메마르게 뱉어놓는 행위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님‘이 보시기에 네 의견은 거슬린다는 태도만 유지해서는 결코 자연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나만 망가질 수없으니 너도 망가져봐라‘라는 시대정신을 가지고는 결코 자연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자연 상태를 벗어난 상태, 즉 ‘정치적’ 사회는 그냥 선물로 주어지지 않는다. - P36
귀찮음에 주목해보라. 그러면 많은 인간사가 설명되는 것 같다. 더러운 사람이 있다. 아, 씻기 귀찮았구나. 갑자기 수척한 사람이 있다. 아, 먹기 귀찮았구나. 착한 사람이 있다. 아, 남을 괴롭히기 귀찮았구나, 너그러운 사람이 있다. 아, 화내기 귀찮았구나. 정숙한 사람이 있다. 아, 연애하기 귀찮았구나. 변온 동물이 있다. 아, 체온 조절하기 귀찮았구나. 버스 종점에서 내린다. 아, 중간에 내리기 귀찮았구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아, 피임하기 귀찮았구나. 자살률이 줄어든다. 아, 죽기 귀찮았구나. - P40
이 모든 과정에서 권력이 동원된다. 즉 욕망과 목표가 있으면 권력은 존재하게 되어 있다. - P52
권력을 싫어하거나 좋아하기 이전에 권력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이 세상이 현상대로 유지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권력이 필요하다. 현상의 변화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권력이 필요하다. - P53
권력을 냉소할 수 있는 것도 권력이다. 권력이라는 엄청난 상대를 두고 차갑게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어떤 권력을 발휘한 결과다. 권력이 진짜 없는 사람은 권력에 대해 냉소하기도 어렵다. 권력이 없다는 것은 당장 어떤 것을 도모하기도 어려운 힘겨운 상태라는 말인데, 어떻게 권력을 냉소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이들은 최저선의 삶을 영위해 나가는 것도 힘겹기 때문에 권력을 냉소하기보다는 권력을 갈망하기 쉽다. 일정한 권력이 있으면서 권력에 대해 냉소를 퍼붓는 일은 자신을 애써 약자로 위치시키는 행위에 가깝다. - P56
예술은 ‘완벽‘이라는 말을 재정의함으로써 국가를 구제한다. 《앙통의 완벽한 수박밭》은 국가의 열망, 관리 욕망, 관리로부터 벗어나려는 고양이의 본능, 탈주하려는 예술적 충동을 차곡차곡 그려 넣은 뒤, 마침내 ‘완벽‘이라는 말을 재정의한다. 《앙통의 완벽한 수박밭》의 마지막 페이지. 난장판이 된 수박밭을 보며 앙통은 말한다. "수박밭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하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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